심리상담사인 내담자가 쓴 편지
울면서 생각했어요.
여기서 왜 갑자기 눈물이 날까? 상담실에서는 왜 울 수 없었을까?
상담실은 원래 눈물이 흐르는 게 자연스러운 공간이잖아요. 늘 그렇다고 생각하고 내담자들에게 얼마든지 편안하게 울어도 된다고 격려를 하곤 하는데 정작 제 눈물은 상담실에서 시작할 수 없었어요. 제가 내담자 입장에 서니 왠지 상담실에서 울고 싶지 않더라고요. 이미 눈물이 고였는데 기어이 흘리지 않으려고 힘을 주고 있던 내담자들이 떠올랐어요. 아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그들의 마음을 조금 더 잘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내담자들은 상담실에서 우는 순간에도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되요. 너무 울다가 그냥 이대로 상담 시간이 다 끝나 버리면 어떡하지? 상담 시간이 끝났는데도 눈물이 안 그치면 어떡하지? 너무 울면 선생님이 난감하지 않을까? 이대로 울다가 밖에 나가면 내 얼굴이 엉망이겠지? 내가 휴지를 다 써버리면 어떡하지? 다음에 올 때 티슈 하나 사 오는 게 나을까? 등등. 이런 복잡한 셈을 하느니 안 우는 것을 택하는 게 속편할 수 있어요. 선생님, 그러니 제가 울지 않은 알리바이는 충분이 성립하지요. 선생님 상담실의 고급스러운 휴지를 제가 다 동낼 수는 없잖아요.
상담실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아요. 굳이 분석해보자면 하나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눈물 흘리는 걸 보여서 동정과 위로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조금 멋있게 이야기하자면 그 눈물이 온전히 내 것이길 바라는 마음. 아무에게도 들통 나지 않고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가 온전히 다 흘러나오길 원하는 거예요. 마구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내가 또 온전히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거죠. 타인이 앞에 있으면 왠지 그의 위로의 눈빛에 반응해주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러다 보면 좀 더 깊이 있는 심해의 눈물을 끌어올리고 싶은데 억지로 감정의 파도를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게 될 수 있잖아요.
사실 그 당시에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것이겠거니 하는 것이지 그때는 눈물을 일부러 숨긴 게 아니에요. 눈물을 흘릴 기미가 전혀 없었거든요. 밖에 나와서 잠깐 쉬고 싶었을 뿐인데. 그 쉬는 찰나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니. 처음에 저도 당혹스럽긴 했어요. 그건 무슨 마음일까. 아마도 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절망감 같은 거라고 짐작해요. 충분히 다 쏟아내고 싶지만 쏟아낼 수 없는 것. 내면 밑바닥에 뭔가 있다고 감지는 되지만 닿을 수 없는 것. 닿았다 한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것. 말로 표현한다고 해도 타인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 영원히 불가해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할 듯한 무엇. 말하자면 인생 그 자체와 비슷하지요. 아무리 살아도 아무리 맛을 보아도 여전히 신비스러운 구석을 감추고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인생처럼. 내가 울어내고 싶었던 것은 인생 그 자체였었나? 잠시 생각해보게 되요. 상담실에서 이런 눈물이 흐르길 바라고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면 제가 참 욕심쟁이였네요.
이렇게 정리하면서 문득 깨닫는 게 있어요. 지금 보니 그게 정확히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여전히 명확하지는 않지만 눈물을 흘렸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요. 내가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눈물은 다 표현해 낸 거예요. 감지만 되었던 것을 감촉할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뭐가 달라졌는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의 한 꺼풀 거추장스러운 외피는 하나 벗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눈물을 흘린 뒤에 홀가분함이 이제 더는 알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도 가볍고 편안하다고 말하는 듯해요. 그것은 애초에 언어로 정리될 것이 아니었으니 안심하라고도 하는 듯해요. 이 눈물은 이 눈물로써 완결됐다고요.
심리상담은 원래 언어로 감정을 포획하는 작업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상담실에서 이 눈물이 꿈틀거릴 기미도 안 보였던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눈물은 언어의 납치를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눈물은 언어의 그물망을 피해 자기 본연의 속성대로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고 싶었던 거예요. 이렇게 보니 기똥차게 자기를 표현한 눈물에 박수를 치고 싶어요. 자랑스러운 나의 눈물아.
좀처럼 울지 않던 내담자들이 끝내 눈물을 흘릴 때. 오랜 아픔을 정화하는 아름다운 눈물을 흘릴 때. 그런 생각이 들곤 해요. 얼마든지 울 자격이 있다고. 그렇게 끝내 울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자신에게 울 자격을 주는 것은 자기만의 삶을 살 자격을 스스로 부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힘든 시간을 버티고 살아낸 자기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귀한 선물 같기도 해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하지요. 한 방울의 눈물은 인생을 논할 자격을 주는 증서 같은 거예요. 그 증서를 그날 저도 저 자신에게 주었던 거라 생각할래요.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려니 문득 선생님의 눈물은 어땠을지 궁금해져요. 선생님도 살면서 많이 울지 않았나요? 박사 과정 정말 힘들게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때 흘렸을 눈물은 어땠을지 잠깐 짐작해봅니다. 고통 속에 지은 그 눈물이 오늘 하루를 살게 하는 원동력은 아니었을지. 심리상담사가 되기 위해서, 심리상담사로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눈물을 지어야만 하는 운명이 있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요.
몇 장에 걸쳐서 우는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지금 저는 웃고 있어요. 도통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내담자가 눈물을 보인다는 건 그리고 그 후에 자기를 바라보며 웃는다는 건 정말 많이 나아졌다는 신호라면서요. 그런 면에서 상담을 이제 그만 종결하는 건 어떨까 생각하고 지나갑니다. 틈만 나면 고개를 드는 생각이에요. 제가 나아졌다는 수료장을 얼른 받고 싶은가 봐요. 그래도 상담에 갈 거예요. 우는 얘기는 편지로 다했으니 그 후속편인 웃는 얘기를 하러 가려고요. 이제 정말 편지를 끝내요. 마지막은 눈물로 쓴 편지답게 시처럼 마무리해요.
가뭄 뒤에 단비처럼
말이 가문 뒤에
말없이 찾아온 눈물.
이 달달한 눈물이 꽃을 피우길.
비온 뒤에 활짝 피는 꽃처럼.
곧게 선 푸른 줄기에 꽃잎 펴고
은은하게 향기를 전해주는 꽃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