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지만 잘 싸웠어.
언제부턴가 유행하는 말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축구를 볼 때면 자주 등장하는 말이지요.
우리보다 강한 상대를 상대로 비록 경기에서는 졌지만
내용 면에서 우리의 최선을 다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졌지만 잘 싸웠어.
이 말은 잘 쓰면 아무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않는 말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이 됩니다.
어제 가나와의 월드컵 경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있었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안 봤다는 뜻이겠지요.
어렸을 때는 새벽 3시고 4시고 벌떡 일어나서 축구를 봤는데
그렇게 환장하도록 해외 축구 경기도 찾아봤는데
어인 일인지 이제 다 시들해졌습니다.
내 삶을 살기에 바쁜 아저씨가 됐다는 뜻일까요?
어쨌든 보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2대 3으로 패했더군요.
음. 그 기사를 읽고 잠깐 스치는 그 기분.
그것은 '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니었습니다.
진심은 외마디 비명이었습니다.
'아 왜!'
이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쩌면 나랑 아무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겼더라면
아침부터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나의 정체성의 일부를 부착한 우리나라 국가 대표가 이겼다는 것,
그 자체로 미세하게 기분이 좋았을 텐데.
벌써 경기 결과를 보자마자 미세하게 기분이 나빠진 것입니다.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감지하고는 생각했습니다.
승복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이 사소한 것에서도, 나랑 큰 상관이 없는 것에서도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구나.
이미 부정적으로 기운 마음의 운동장에서는
졌지만 잘 싸웠다고 할 수 없구나.
보다 진실한 말은 이것입니다.
잘 싸웠지만 졌어.
아니, 어쨌든 진 건 진 거야.
그게 더 진정성 있는 말입니다.
진 것을 완전히 인정하고 나야
진 경기를 마음에서 털어내고
그다음 경기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겠지요.
잘 싸웠다는 위로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졌다는 것을 깨끗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질문을 나에게 돌립니다.
축구 국가대표야 어찌 됐든
내 삶의 대표는 나니까 나를 돌아봅니다.
과연 나는 2022년 한 해 동안 잘 싸웠다고 할 수 있는가?
올 한 해를 돌아보면서 졌든 이겼든 어쨌든 잘 싸웠다고 할 수 있는가?
부끄럽기도 합니다.
한동안 몸이 아프기도 했고 이후에도 골골거리는 컨디션이 계속됐습니다.
평소의 페이스대로 돌아오지 못했던 날들.
최근까지도 그러고 있는데 과연 이것은 잘 싸우고 있는 것인가?
잘 싸웠다고 포장하지 않습니다.
진 부분은 졌다고 깨끗하게 인정하기로 합니다.
과거에 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졌지만 잘 싸웠어.
마음이 이렇게 얼렁뚱땅 말하려고 하면
나 자신에게 이야기해주려고 합니다.
잘 싸웠지만 졌어.
어쨌든 졌어.
마음에서 마음을 끝냅니다.
분명한 사실을 직시하고 인정합니다.
툭툭 털고 일어나 다음 걸음을 걷습니다.
그리고 마음에게 한 마디 툭 건넵니다.
이미 졌는데 뭘 어쩌겠어?
2022년 진 것이든 이긴 것이든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당신은 올 한 해 무엇을 졌나요?
그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그나저나 그게 과연 지긴 진 걸까요?
당신도 나도
졌든 안 졌든 홀가분한 마음으로 계속 전진할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