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서점이자 심리상담센터를 청소했습니다.
빗자루질을 하는데 오늘따라 먼지가 잘 쓸립니다.
쓰레받기에 잘 담긴 먼지를 바라봅니다.
청소가 잘 되어 흡족해합니다.
'청소가 잘 됐다고?'
머릿속에 딴지가 걸립니다.
장자에게 사사받은(?) 심리상담사답게
갑자기 생각은 붕새처럼 하늘 높이 비상합니다.
청소를 하다 보면 가끔 의문이 듭니다.
이것은 청소인가
아니면 단지 이동인가.
나는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고 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곳에 있던 쓰레기를 저곳으로 옮겼을 뿐.
붕새를 타고 생각은 사바나로 날아갑니다.
내가 방금 쓸어 담은 먼지가 사바나에 있었다면?
그 먼지가 쓰레기로 보일 리가 없겠지.
내가 지저분하다고 생각하고 치우는 쓰레기가
심지어 세상 다른 곳에서는 자연 그 자체일 수도 있겠지.
나는 빗자루질을 하다 말고 고개를 숙입니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부식과 침식을 시키는 자연의 풍화작용 앞에
쓰레기를 이동시킬 뿐인 나의 빗자루질이 무색합니다.
'청소'라는 어불성설.
대자연의 질서를 생각하다가
인간인 나의 생각과 행위가 얼마나 좁은지 깨닫습니다.
엄연히 자연의 질서를 지키고 있는 먼지가 내게 말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그것이 자연이야.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거야.
늘 그래.
내가 묻습니다.
그럼 너의 제자리는 어디니?
지금은 쓰레받기 안이지.
그래? 그건 내가 쓸어 담아서 억지로 너를 집어넣은 곳이잖아.
지금 이 순간 난 쓰레받기 안에 있어.
그러니 여기가 나의 자리야.
아.
네가 나를 쓸기 전에는 바닥이 나의 제자리였어.
네가 나를 쓸어 담은 지금은 쓰레받기가 나의 제자리야.
이따가 쓰레기통으로 간다면 이따가는 거기가 나의 제자리야.
언제든 제자리에 있는 거구나.
그래. 그걸 우리는 자연이라고 하지.
왠지 그 '우리'에 나는 빠져 있는 것 같아.
네가 제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깜박할 때는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제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깜박할 때.
그래. 자연은 늘 제자리에 있어.
이 우주에 지금 제자리에 없는 것은 하나도 없어.
내가 청소를 한다고 착각할 때,
내가 제자리를 찾게 해주는 거라고 착각할 때.
알아차렸네.
자연은 그런 거야. 스스로 그냥 그대로 있는 것.
그걸 깨달은 이 순간 너도 제자리에 있는 거야.
이내 먼지가 침묵합니다.
내 머릿속 붕새도 착륙합니다.
제자리에 있을 줄 아는 먼지를 쓰레기통에 털어 넣습니다.
청소를 마치며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음을 다시 한번 바라봅니다.
당신은 오늘 제자리에 있나요?
당신 삶에서 제자리에 있는 것은 무엇이고, 제자리에 없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자리에 없는 것 같은 그것이 혹시라도 그것의 제자리에 있는 건 아닐까요?
나는 오늘 내 마음에도 자연의 질서가 지배하도록 허락합니다.
나의 낡은 생각이 부식, 침식, 풍화작용을 겪도록 허용합니다.
내 안에 자연을 들이고 내면에서 자연이 자라나도록 합니다.
나도 온전히 자연의 일부로 제자리에 섭니다.
나는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나만 빼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나도 비로소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