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워요.

by 나무둘

오늘도 서점이자 심리상담센터를 청소했습니다.


오늘 아침은 쌀쌀했습니다.

요 며칠 5월 말에 벌써 여름이 다가오는가 싶었는데

오늘 새벽은 가디건이라도 하나 걸쳐야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청소를 하면 금세 몸이 후끈 달아오를 것을 믿고

열심히 청소를 합니다.


먼지떨이를 털러 밖으로 나왔는데 옆집 할아버지가 보입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가 요새는 자주 보입니다.

이 아침에 함께 청소하는 우리!

늘 반가운 마음이 들지만 늘 인사를 하는 건 아닙니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는 한 우리는 그저 각자의 청소를 합니다.


전에는 일부러 다가가서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5m 거리에서 인사를 했다가 아무 반응을 못 얻어 무안했던 나는

3m, 1m로 점점 거리를 좁히며 인사를 하고

끝내 인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참 무안한 일이지요.


그때 이후로 말로 하는 인사보다는

마음으로 하는 인사를 더 소중히 여기기도 합니다.

적어도 할아버지와 나, 우리 둘 사이에는

그런 인사가 더 적당하지 않은가 생각도 해 봅니다.


부부나 커플 심리상담을 할 때 흔히 하는 조언이 있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마음에 있다면 말로 꼭 표현하세요."


불변의 진리 같은 이 말이 늘 정답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나와 할아버지 사이를 보고 깨닫습니다.


눈이 마주쳤을 때만 인사할 것.

우리는 모종의 합의를 했습니다.


서로의 묵언 청소를 존중하자.

우리 서로 말없이 인사하자.

마음으로만.


내가 몸 담고 있는 현대 심리학과는 정면으로 위배되지만

삶이 먼저 있고 심리학이 있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지

심리학이 삶을 말하는 게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지떨이에 붙은 먼지를 털면서 괜히 시간을 끕니다.

할아버지가 이쪽을 바라보면 냉큼 인사해야지.

할아버지의 얼굴이 이쪽을 향하길,

내 눈과 마주치길 기다리면서

하염없이 먼지떨이를 텁니다.


그냥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를 할까 싶다가도

그건 동양적 삶을 구가하는 우리 사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한 템포 더 마음을 늦춥니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침묵.


애먼 먼지떨이만 수차례 털립니다.

끝내 할아버지는 이쪽을 보지 않습니다.

이제는 털 먼지도 없어 터는 동작을 멈춥니다.

할아버지는 자기의 청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나의 청소를 마무리하러 다시 들어갑니다.


서로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할아버지도 내 존재를 의식했다는 것을.

말로 인사를 건네기 전에 우리는 서로에게 인식됐고

그것으로 모든 말을 대신하고 아침 인사를 마쳤다는 것을.

실로 동양 수묵화에 나올 듯한 여백의 아름다움을 담은 인사.


나는 기존의 서구 심리학을 수정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워요."


사실 우리는 누구나 가장 편한 상대에게 원래 이렇게 하지요.

말없이도 참 편한 그대와 자연스럽게 존재합니다.

함께 존재하고 서로 존재함을 인식함으로써

모든 말을 대신합니다.


당신이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인가요, 표현되지 못하는 것인가요?

혹시 그것은 말이 없이도, 말이 없을 때에야 온전히 표현되지는 않나요?


청소를 마치고 아무 말이 없이

탁 트인 하늘을 바라봅니다.

가만히 서 있는 나무를 바라봅니다.


알아차립니다.

모든 것이 말없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자연은 아무 말 없이 서로 화답하고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나는 오늘 다 말하지 않아도 좋은 나의 인생.

애써 말하지 않아서 더 자연스러운 내 인생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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