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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둘 Feb 12. 2022

성장, 부모의 아이가 자신의 어른이 되기까지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현대인은 병원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세상에서 처음 조우하는 사람은 대개는 간호사나 의사 선생님이겠지요. 이런 익살스러운 사실은 그만두고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게 처음 존재로 다가오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내게 부모란 어떤 사람인가요?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나요? 심리상담을 받으러 오는 수많은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내 속내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받아주지 않아서 쌓인 원망과 분노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깔끄러운 마음이 대인관계에서도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그제야 심리상담을 받으러 옵니다. 마음에 난 큰 구멍 하나를 가지고서 말이지요. 한데 안타깝게도 그 큰 갈망을 메울 길은 참 요원합니다.  


예전에 가끔 장애인 복지시설에 봉사활동으로 심리 프로그램을 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던 것이 있습니다. 뭔가 지원을 해준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찾아가면 저는 도착하는 순간부터 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현관에 도착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두 팔을 벌리며 뛰어나오는 어르신을 보면 왠지 부끄럽고도 행복해지면서 ‘여기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분들의 따듯한 미소와 환대는 일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것이었지요. 만날 때마다 그렇게 환대하는 주위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곳을 방문하면 내 존재가 분명하게 확인되었습니다. 그 감동은 다소 버거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좋아도 속내를 감추며 사회생활을 하는데 너무 익숙하니까요. 밀당의 스릴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게 순수하게 다가오는 그분들 때문에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은 더욱 선명하게 감각되었습니다. 


상처받거나 상처를 방어하는데 익숙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누군가 자기를 완전히 개방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경험은 신선한 충격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열어젖히고 나를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법입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상처가 없는 척 꽁꽁 싸매느라 오히려 덧난 상처와 굳은살 같은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까칠하게 굴더라도 내심 그 상처를 다 내보이고 치유받고 싶어 하지요. 우리 마음속에는 큰 사랑과 자비를 품은 존재에게 기꺼이 나를 내맡기고 그 품 안에 뛰어들어 안기려는 충동이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갓난아이일 때, 자기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행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사 여부를 쥐고 있는 부모에게 그것을 바랍니다. 그리고 심리학적으로는 취학 전인 대략 6살까지, 사회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밥벌이를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연령이라는 9살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물론 인정과 사랑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기본 심리입니다. 어린 시절 후에도 사랑받고 수용되고자 하는 마음은 계속되지만, 그 시기만큼 우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완전한 부모가 있으면 참 좋으련만, 부모는 어떤 사람인가요? 성인이 되어 삶의 무게를 짊어지면서 깨닫게 되지만 세상살이를 하는 게 녹록하지는 않은 게 현실입니다. 그 혼돈의 과정 속에서 나를 낳고 가족을 꾸려 나간 사람이 내 부모이지요. 성인이 되고 나서야 내가 경험하듯이 지금 내 나이의 부모 역시 그 시절 그런 상처와 혼란을 경험하면서 나를 키웠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되지요. 그리고는 진퇴양난의 심정이 됩니다. 이제 와서 부모를 이해하자니 내가 받은 상처는 다 어쩌란 말인가.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나의 서운함은 이제 영영 보상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하다못해 생떼라도 한 번 써보고 싶어 하지만 일말의 사랑과 일말의 죄책감으로 인해 그마저도 하지 못하며 괴로워합니다. 이처럼 꽉 막힌 국면에 타개책은 없는 것일까요? 


장애인 복지시설에서도 유난히 밝았던 그분, 우리 일행이 찾아가면 너무 대놓고 격하게 좋아하셔서 부담스러웠던 그분이 살아온 이야기를 뒤늦게 듣게 된 적이 있습니다. 복지시설 관리자를 통해 그분의 삶을 들으면서 ‘아니 정말요?’를 몇 번이나 내뱉었습니다. 일반인이라면 몇 번이나 무너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삶을 살았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지요. 나중에 그분의 환한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른은 자기 상처에서 웃음꽃을 피우는 사람이다.’


완전한 부모를 못 만나서 인생이 아쉽다 해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두고 지금부터는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내 아이의 존재에 책임을 지는 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없다면 내가 나 자신의 어른이 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의 어른이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럴 때 도무지 가망이 없어 보였던 과거의 상처도 함께 치유됩니다. 그것이 상처에서 웃음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부모처럼 되는 데는 얼마나 연습이 필요할까요? 한 아이가 엄마라는 말을 처음 내뱉기까지 2만 번을 듣고 연습해야 한다고 하지요. 한 아이가 언어학적으로 엄마를 획득하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도가 필요합니다. 한 여자가 아이에게 엄마로 승인되기까지 2만 번의 프러포즈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되는 일이 그러하다면 나도 나 자신을 어른으로 키우기까지 그 정도의 사랑과 정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수도 없이 넘어지고 일어서고, 그때마다 자기를 완전히 열고 받아주기를 반복하고, 과거에 속 쓰려지려고 할 때마다 오히려 과거의 상처를 통해 꽃을 피우려고 용기를 내면서 나는 나 자신의 어른이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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