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내 안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은 바짝 날이 서서 '이럴 시간에 뭐라도 해야지'라고 다그치고
또 한 사람은 이불 속 어딘가에서 '그냥 다 포기하고 싶어'라고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늘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방황한다.
어느 목소리가 더 옳은지도 모르겠고
가끔은 그 모든 말들이 나를 조금씩 끌어당기고 놓아주는 바람에
정작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에 멈춰 설 때도 있다.
그러나 상담실에서 수없이 마주한 진실 하나는
이 목소리들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다그치는 나도, 안아주는 나도,
심지어 아무 말 없이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그 한 조각조차도
모두 내가 살아낸 시간의 얼굴이라는 것.
우리는 종종 내 안의 어떤 목소리를 미워한다.
‘왜 늘 약하고 느려?’
‘왜 그렇게 냉정하지?’
그럴 때 나는 조심스럽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이 모든 자아들이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다는 상상.
그리고 내가 그 사이를 조용히 돌아다니며 차를 따라주고,
각자의 말을 들어주는 장면을 떠올린다.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느 하나를 몰아내는 게 아니라,
그 모두를 ‘듣는’ 것이다.
“그래, 너는 그렇게 느꼈구나.”
“그 말, 오늘은 고맙지만 잠시만 쉬어줄래?”
이런 식의 대화가 가능해질 때
우리는 자신과 조금 더 진실하게 살아가게 된다.
삶은 단순한 수학문제가 아니다.
정답은 없다.
대신 나의 하루를 살아내는 방식은 있다.
그건 내면의 소란을 잠재우는 게 아니라
그 소란 속에서도 내가 무엇을 가장 따뜻하게 느끼는지
그 한 줄기의 감각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다.
더 이상 완벽한 하루를 꿈꾸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늘 하루
내 안의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도
더 껴안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