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내는' 것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마음을 꺼내어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봅니다. 조심스럽고 낯설지만 이 말을 어딘가에 남기지 않으면 계속 무너질 것 같아서요.
저는 자주 "난 감정이 없어"라고 말해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제가 참 담담하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차갑다고도 했습니다. 처음엔 그 말들이 조금 서운했지만 곧 익숙해졌습니다. 아마도 스스로 그렇게 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마음을 들키지 않으면 덜 아플 수 있을 거라고,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운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다는 스스로를 다잡고, 눈물을 삼키는 것이 어른스러운 거라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감정이 밀려오곤 합니다. 혼자 있을 때, 아주 조용한 밤, 문득 오래전 기억 속에 머물게 될 때요. 그럴 땐 왜 이렇게 마음이 서럽고 조용히 아픈 걸까요. 감정을 느끼는 것이 두려워서, 다시 차단 버튼을 누르듯 무감각을 선택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차단이 저를 너무 외롭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압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마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용기'라는 말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 안에 어떤 물결처럼 잔잔히 퍼졌습니다. 어쩌면 저도 지금 아주 조금은 그 용기를 내보고 싶은 것 같아요. 감정을 느끼는 일이 꼭 연약한 게 아니라는 걸 믿고 싶어요. 여전히 두렵지만 이제는 이 벽 너머의 나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제가 이 벽을 조금씩 허물어도 괜찮을까요? 너무 오랜 시간 방치한 마음이라 그 안이 어떤 상태일지 저조차도 짐작이 가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을까요?
저는 잘 살아내고 있는 걸까요? 아니 살아내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그저 제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요.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당신의 편지를 읽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신이 쓴 '조심스럽고 낯설다'는 그 마음이 저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더라고요.
"난 감정이 없어"라고 말해온 당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오히려 당신에게 얼마나 깊은 감정이 있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고 진솔한 글을 쓸 수 있겠어요? 당신은 감정을 느끼지 않은 게 아니라 느끼지 않는 쪽을 선택해 온 거예요. 그리고 그 선택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고요.
어릴 때부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 참 마음에 남아요. 아마 그때 그 어린 당신에게는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겠죠. 눈물을 삼키고 스스로를 다잡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배웠다고 하셨는데... 정말 많이 외로웠을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혼자서 그 모든 걸 감당해야 했다면.
그런데 지금도 가끔 감정이 밀려온다고 하셨죠? 조용한 밤에 혼자 있을 때. 그럴 때마다 왜 이렇게 서럽고 아픈지 모르겠다고요. 저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차단하려 해도 마음이라는 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거든요. 다만 깊숙이 숨어있을 뿐이죠.
당신이 "벽 너머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쓴 문장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울컥했어요. 그 벽을 쌓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그리고 이제 그걸 허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지요. 벽을 조금씩 허물어도 괜찮냐고 물으셨는데... 물론이에요. 괜찮을 뿐만 아니라 저는 당신이 그 용기를 내주어서 고마워요. 오랫동안 방치된 마음이 어떤 상태일지 모르겠다고 하셨지만 저는 분명히 거기에 여전히 따뜻하고 소중한 것들이 남아있을 거라고 믿어요.
감정을 느끼는 게 연약한 게 아니라는 걸 믿고 싶다고 하셨죠. 맞아요. 감정을 느낀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기쁘고 따뜻한 것들도 함께 느낄 수 있게 되거든요.
잘 살아내고 있냐고, 살아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냐고 물으셨지요.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잘 해낸 게 아닐 수 있나요? 그리고 이제는 단순히 '살아내는' 것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이미 큰 변화의 시작이에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여기 있어요.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요. 당신이 마음을 열어가는 그 과정을 느리더라도 함께 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하고 싶어요. 당신이 이 편지를 쓴 것만으로도 이미 벽에 작은 문을 하나 만든 거예요. 그 문으로 조금씩 빛이 들어올 거예요. 서두르지 말고 당신만의 속도로 가면 돼요.
고마워요. 이런 소중한 마음을 나눠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