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상담 편지

감정을 꺼내면 무너질 것 같았어요.

느낌은 생명의 움직임이에요.

by 나무둘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 상담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연습이구나. 나는 지금 '느끼는 연습'을 하고 있구나."

예전엔 그저 참는 게 잘하는 거라고 믿었어요. 울지 않고 말하지 않고 묻지 않고 그러면 세상이 덜 위험해질 거라고 믿었죠. 감정을 꺼낸다는 건 곧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이고 그 나약함은 누군가에게 틈이 되어 결국 나를 무너뜨릴 거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항상 감정을 분석하려 했어요. 왜 이 감정을 느끼는지 어떻게 생겨난 건지 그걸 알아야만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선생님 앞에서 '불안해요'라고 말한 그 순간 갑자기 내 마음속에서 뭔가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아니 무너진 게 아니라... 터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왔던 감정들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느낌이었어요. 참 낯설었고 솔직히 무서웠어요.


그런데도 그 말이 나왔다는 게 참 이상해요. 왜 그랬을까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제는 그 감정을 조금은 믿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프지만 진짜인 무언가를 마주하고 싶었고 그게 결국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렇게 하나씩 말할 수 있게 되면 언젠가는 내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까요? 더 이상 '약해지면 안 된다'는 목소리에 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품을 수 있게 될까요?


저는 아직도 이게 정말 맞는 길인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더디고 가끔은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계속 가보고 싶어요. 이 연습이 언젠가 저를 진짜 사람답게 만들어줄 거라고 그런 믿음 하나로요.

들여다봐주셔서 그리고 저를 감정 있는 존재로 바라봐주셔서 고맙습니다.


a9a299cf-53d8-4904-84f9-ab6679b3bbb8.png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보내는 답장]


불안하다는 말을 처음 꺼내던 그 순간 당신의 눈빛에 담긴 떨림과 용기를 저는 잊지 못할 거예요. 그것은 결코 작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평생이 걸리기도 하거든요.


어린 시절부터 '느끼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라는 메시지 속에서 살아왔다는 당신의 고백이 저에게는 단지 한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이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억눌러 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살아 있는 증거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억압을 뚫고 아주 조심스럽게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용기라는 단어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어떤 깊은 생의 움직임이에요. 눈물이 난다고 약한 게 아니라 그 눈물은 내가 지금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감정은 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하나씩 다시 느껴보는 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싸움 중 하나라고 저는 믿어요.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건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가 스스로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그건 너무 낯설고 더디고 때로는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당신의 그 느릿한 발걸음 속에는 분명히 '진짜 나'로 향하는 방향이 담겨 있어요.


무엇보다 저는 당신이 더 이상 자신을 분석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살아 있는 감정의 주체로 인정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느껴요.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멋지고 귀한 여정입니다.


당신은 절대 혼자 걷고 있지 않아요. 이 연습은 언젠가 당신의 삶을 더 깊이 있게 더 인간답게 만들어줄 겁니다. 살아 있다는 건 매일 조금씩 더 진짜 내가 되어가는 일.

그 여정을 함께 걷게 되어 저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럼에도, 나부터 믿어보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