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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하나의 세계다

우리는 때때로 길을 잃어야 한다

by 정안

파리여행의 둘째 날 메트로를 타고 몽마르트르에 갔다.


아베쎄(Abbesses) 역에서 내리니 가까운 곳에 '사랑해 벽'이 보인다. 그곳으로 가려고 공원을 돌다가 길을 잃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났다. 우리는 때때로 길을 잃어야 한다.


교회보다 더 오래된 파이프 오르간(1852년 제작)


생장 드 몽마르트르 Église Saint-Jean de Montmartre

1904년 완공된 이 교회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프랑스 최초의 종교 건축물이다. 벽돌과 세라믹 타일로 마감한 구조와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아르누보 양식이다.

*아르누보(Art Nouveau) : 길고 유기적인 선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교회가 있어 언덕 아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신부는 건설 자금을 모금하여 학생 건축가의 설계로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방식인 철근 콘크리트로 언덕 아래에 교회를 짓는다.


교회 정면이 붉은 벽돌로 덮여 있어 "벽돌의 성자(Saint-Jean-of-the Bricks)"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고 한다. 이제까지 보던 교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날씨가 흐려서 붉은 벽돌이 더 돋보였고 교회 내부는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하고 엄숙했다.


교회에서 나와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향해 걸어가는데 단체 여행객을 만났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있고 연령층도 다양했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거리 풍경과 어울려 보기 좋았다. 앞에서 가이드가 설명을 하고 있어 들으려고 조금 뒤를 따라다니다 영어가 짧아 잘 못 알아듣기도 하고 자유롭게 가고 싶기도 해서 다른 길로 갔다.


지금 와 생각하니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여정이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건물을 보러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이 있어 편안했고 위로를 받았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몽마르트르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골목길을 헉헉대며 올라가니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다 올라와서 보니 푸니쿨라(트램형 케이블카) 정류장이 보인다. 올라오는 방법은 걸어오거나 푸니쿨라를 타고 오거나 할 수 있다.


이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약속들로 철조망이 휘었다. 굳게 잠그고 열쇠는 어디에 두었을까.


약속을 채우고 열쇠는 던져버린 후 유유히 사라지는 사람들이 가상현실처럼 내 앞에 펼쳐지는 건 왜였는지.

이 약속들은 주기적으로 제거될 것이다. 약속만을 남기고 세계로 흩어진 사람들을 대신해서.


사크레쾨르 대성당 Basilique du Sacré-Cœur de Montmartre

대부분이 평지인 파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1870년 프랑스가 프로이센(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다음 해에는 파리 코뮌으로 혼란해진 시대에 민중의 사기를 높이고 가톨릭교도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모금을 통해 건립한 성당이다.

*파리코뮌
: 1871. 3. 18. ~ 5. 28. 까지 약 70일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자유 지상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운동. 70일 간 존속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이며 프랑스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공산주의 정권이다. 자코뱅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이념으로 구성되어 여성 참정권 보장, 노동 시간제한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새하얀 파사드와 높은 돔이 특징인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어우러진 웅장한 외관을 가지고 있으며, 성당 앞에는 잔 다르크 동상이 있다. 40년간의 건립기간을 거쳐 1919년 준공하였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조심스럽게 걷다가 자리에 앉아 여행자로서 미사에 참여했다. 신부님의 기도 소리가 서서히 퍼지면서 진행되는 미사는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 울림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일어나서 성당 내부를 둘러보려는데 천상의 목소리라는 표현만이 생각나는 성가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미사 상황을 실시간 중계해 주는 커다란 모니터를 보니 수녀님이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수녀님의 몸을 빌려 신성한 누군가가 노래하는 듯이 느껴졌다.


성당은 갑자기 성스러운 어떤 것으로 꽉 차 올랐다. 전율이 느껴지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몽마르트르(Montmartre) 거리와 몽마르트르 미술관

로마 점령 시기인 서기 250년경 생 드니 성자가 이곳에서 참수형으로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현재 파리 북부의 생드니 성당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고 하는 전설에서 몽마르트르(순교자의 언덕)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 몽(Mont 작은 언덕), 마르트르(martre 순교자) = 순교자의 언덕


1871년 파리 코뮌의 혁명 봉기가 시작된 곳이며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벨 에포크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몽마르트르에서 거주하거나 작품활동을 했다. 피카소, 고흐 등이 대표적이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 19세기말~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경제, 문화가 급속하게 발전한 시기를 뜻한다.


성당을 나와 몽마르트르 예술가들의 거리로 나왔다.걷다가 상점에서 에펠탑 마크가 있는 겨울 모자를 하나 샀는데 다들 빵집인 파리바게트 사은품인 줄 알았다고 놀린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뒤쪽으로 해서 몽마르트르를 내려왔다.

가파른 계단이 있어 내려오는 게 조심스러웠지만 조금씩 내려가면서 소박한 집들과 달라지는 도시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오른쪽 그림 몽마르트르의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코팽의 막다른 골목(1910)"과 같은 모습이다.


걸어가다가 웅장하고 멋진 건물이 있어 사진을 찍고 보니 기차역(파리 북역, Gare du Nord)

프랑스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유럽에서도 최대의 역이다. 기차역이 그 자체로 거대한 예술품이 되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겨울이라 쌀쌀한데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켜놓고 혼자서 여유롭게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모습은 파리의 거리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여행을 떠나 만나는 낯선 것은 다 아름답다.

걷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수제 햄버거를 시키고 맥주와 커피를 시키는데 주문받는 사람이 '아메리카노?' 한다. 살짝 놀랐다. 이제까지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사람들이 마시는 커피는 조그만 잔에 에스프레소였고 메뉴에 '커피'라고 쓰여있는 것을 주문하면 항상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그래서 프랑스에는 아메리카노가 없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나 보다. 내가 너무도 즐거워하며 "예스! 아메리카노!" 하자 주문받는 사람은 이유도 모르면서 기분 좋아한다.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거리 풍경을 보았다. 아름다운 건물들을 배경으로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엄마부터 다투다 갑자기 화해하고 포옹까지 하고 가는 연인, 비를 맞으며 캐리어를 끌고 지나가는 여행자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천천히 갈 길을 가는 사람, 옷차림도 롱패딩부터 반바지까지 다양하다.


돌아보니 무심히 앉아 있던 그 시간이 행복했다. 에스프레소 한잔을 놓고 하염없이 앉아 있던 사람들을 이해할 것 같다.


흐린 날의 파리는 중세시대처럼 느껴진다. 차와 사람만이 현대적이다. 파리는 걷는 것이 즐거운 도시다.


퐁피두 센터 Centre Pompidou

1971년에 착공해 1977년 1월에 개장했다. 정확한 명칭은 국립 조르주 퐁피두 예술문화센터로, 이 센터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조르주 대통령의 예술에 대한 열정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퐁피두센터로 이름 지었다.


퐁피두센터는 대규모 공공 정보도서관,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샤갈 등 20세기 거장들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영화관, 강연장, 서점,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있는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다.


이곳은 예술에 대한 어떠한 편견도 허락지 않으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는 모든 작품에게 항상 열려 있는 포용력 강한 공간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을 감상하는 것, 그 안으로 들어가 근현대 미술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 센터 앞 광장의 다재다능한 예술가들의 공연에 빠져 보는 것, 심지어 아이디어 넘치는 물건이 가득한 상점 구경까지 모든 활동들이 즐겁고 행복한 예술, 문화활동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퐁피두 센터 짐 보관소

처음에 들어가서는 짐보관소가 맞나 하고 다시 푯말을 봤다. 상당히 기괴하고 현대적인 짐 보관소.... 우리가 헤매고 있자 프랑스인 부부가 와서 친절히 도와줘서 겨우 짐을 넣을 수 있었다.


외부로 노출된 투명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며 본 파리 모습


스트라빈스키 분수대, 물 한가운데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벽화가 있다.


현대적이고 다양하다. 그냥 목적 없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고,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공간이다.


조용한 전시실에 활기찬 움직임이 있어 보니 선생님과 체험학습을 나온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 상당히 진지했고 부지런히 작품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뭔가를 적었다. 아이들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봄꽃 같다.


퐁피두 센터에서 루브르 박물관 가는 길에 본 루이비통의 복합 문화공간

퐁피두 센터를 나오면서 빡빡하게 일정을 짠 스스로를 원망했다. 서서히 해가지는 파리의 건물들을 카페에 앉아 무심히 바라보고 싶었고, 하나둘 불이 켜지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보고도 싶었다. 그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밤거리를 배회하고 싶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 예약시간이 다가온다...


루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

기원전~19세기초 작품들이 이곳에 있다. 왕실에서 수집한 각종 미술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소극적 의미의 미술관이었으나 나폴레옹 집권 후 수없이 많은 원정 전쟁을 통해 예술품을 약탈했고 매입하고 선물도 받으면서 대규모 박물관으로 변모하였다


1981년에는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계획으로 전시관이 확장되고 1989년 박물관 앞에 건축가 I.M. 페이(Ieoh Ming Pei)의 설계로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면서 대변신을 하게 되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225개 전시실에는 그리스, 이집트, 유럽의 유물, 왕실 보물, 조각, 회화 등 40만 점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걸어오다가 길을 잃어서 예약시간에 겨우 도착했다. 서서히 해가 지고 하나둘 불이 켜지는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는 아름다웠다.


우리가 루브르에 간 날은 금요일, 저녁 9시 45분까지 야간 관람이 가능했다.


안내데스크에 있던 한국어 '어서 오십시오', 머나먼 타국에서 만난 한국어가 반갑고 뭉클하다. 루브르에는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언어가 지원되는 9개 나라에 들어있다니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아름답고 화려하다.

일상에서 쓰고 보고 생활하는 물건들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 건가 할 정로로. 예술이 우리를 지치게 할 정도로 볼거리가 많았다. 나중에는 비상구를 찾아 나가고 싶어졌다. 다음에 온다면 루브르만 3일 정도 봐야 할 것 같다.


루브르를 나와 샹젤리제 거리를 거쳐 개선문까지 걸어가는 한 시간의 길은 아름다웠다.


에투알 개선문 Arc de Triomphe l' étoile

전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1세를 기념하기 위하여 고대 로마의 개선문을 본떠서 세운 것으로 1836년에 완성되었다. 개선문이 있는 샤를드골 에투알 광장은 12개의 대로가 별 모양으로 둘러싸 있어서 별처럼 보인다고 해서 별이라는 뜻의 에투알(étoile) 광장이라고 불린다. 그 대로 중 하나가 샹젤리제 거리이다.


밤의 샹젤리제 거리는 꿈꾸는 거리이다.


가까운 듯 먼 개선문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고급스러운 상점들도 볼거리 중 하나지만 크고 작은 버스킹과 참여형 공연이 길 곳곳에서 열리고 있어 걸음을 저절로 멈추게 된다.


루이뷔통 건물이 보여주는 과감한 상상력


개선문 전망대에 올라가는 계단

개선문 전망대에 올라가려면 샤를 드골 에투알역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서 표를 끊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우리 바로 뒤에 10대 소년들 한 무리가 따라왔다.


조금만 올라가면 될 줄 알고 내가 맨 앞에 서서 올라가는데 가도 가도 끝이 안보였다. 다리가 후덜덜했지만 뒤에 따라오는 소년들이 있어 온 힘을 다해 올라갔다. 뒤에서 아이들의 힘찬 발걸음이 들려오고 아이들도 힘든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그 소리를 응원가 삼아 올라갔는데 다 올라와서 거의 쓰러질 듯 서있었더니 뒤에 오던 소년들이 한 사람씩 모두 손을 흔들며 나에게 응원의 말을 던지고 간다. 아이들이 귀엽고 기분 좋고 뿌듯했다.


개선문 맨꼭대기 전망대에서 파리의 방사형 도로가 주는 과학적인 아름다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무명용사의 묘 Unknown Soldier whose grave

개선문 중앙 아치에 꺼지지 않는 불꽃과 신선한 꽃이 항상 바쳐지는 곳.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무덤이다. 매년 7월 14일 이곳에서 군사 행렬을 하고 11월 11일에는 무명용사의 묘비 앞에서 군사들을 기억하는 행사가 있다고 한다.


'백만 명이 죽었다'라고 하면 그건 통계야.

백만 명이 죽어도 그건 다 한 사람의 사적 죽음이거든. 그걸 잊으면 안 돼. 이 세상에 백만 명이라는 건 없어.

-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다.





매주 목요일 연재하는 글입니다.


연재 마지막 글 "프랑스를 떠나며"는 3.14(목)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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