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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겨울에 떠난 남프랑스

by 정안

아비뇽 숙소 2박 3일의 마지막 날, 아비뇽을 여행하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었다.

구름을 째고 해가 나오듯 하늘이 붉은색과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 성벽도시 아비뇽의 오래된 나무들이 우우우 소리를 낸다.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은 부딪히는 높은 건물 하나 없이 제 마음껏 불어 제꼈고 보이는 풍경의 절반 이상이 하늘이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하다.



아침을 먹고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했다. 숙소 근처 짐보관소에 들려 캐리어를 맡기고 바로 옆 관광안내소에서 아비뇽 패스(교황궁+생베네제 다리)를 샀다. 아비뇽 하면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작품의 '아비뇽'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비뇨'로 이곳 아비뇽이 아니라고 한다.


아비뇽은 프랑스 남동부의 론 강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인구 9만 3천의 중소도시이다.


시가지는 론 강을 끼고 형성되었고, 중세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가지 전체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비뇽의 영토는 1309년 아비뇽 유수로 교황청이 들어설 때부터 교황의 봉신인 프로방스 백작들의 영지였다. *봉신 : 봉건제 사회에서 주군에게 봉사하는 대가로 봉토를 받던 사람

아비뇽 유수 :
1309년에 교황 클레멘스 5세가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긴 뒤
1377년에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돌아갈 때까지의 7대에 걸친 기간.
교황권이 프랑스 왕권에 굴복한 것을 포로로 갇혀 있던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1348년 아비뇽은 교황이 직접 관리하는 교황 소유지가 되었고 이후 1791년까지 교황의 영토였다가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정부에게 점령되었으며 그 이후로 프랑스령이 되었다. 교황 특사의 통치를 받다가 1791년 프랑스령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고 교황청의 내부가 파괴되었다.


아비뇽 구시가지는 14세기 축성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교통이 매우 발달한 도시로 철도역 2개와 공항이 있고 TGV의 분기점이기도 하며,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 철도 노선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라피데르 박물관 Musée Lapidaire

아비뇽 중심 거리에 있다. 17세기에 지은 바로크 양식의 예배당을 개조하여 고고학 박물관으로 1933년 개관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남부, 로마, 이집트 등 다양한 문명의 기념비적인 고대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여러 가문이 기증한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이다. 봉헌 부조, 둥근 조각품, 장례식 비석과 비문, 석관 그리고 일상생활의 물건들(꽃병, 테라코타)이 전시되어 있다.


거리를 걷다 우연히 들어간 박물관이다. 참으로 세심하게 모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일상생활에 쓰는 물건부터 규모가 큰 유물까지 다양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강대국 박물관은 불편한 진실을 숨기고 있다. 그들이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유물들에게서는 약탈자의 손길이 강하게 느껴진다.


나오면서 본 미라는 너무 사실적 이어서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2~3살 정도 되는 아이의 미라라고 한다.

실제 아이는 아니고 기원전에 미라를 방부하는 작업기법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다.


교황의 무덤
교황청 식당
에바 조스팽 Eva Jospin의 전시

아비뇽 교황청 Palais des papes d'Avignon

*palais (프랑스어) 궁전; (특히) 프랑스 정부·지방 자치 단체 건물
-교황궁, 교황청을 섞어 쓰는데 교황청이 맞을 것 같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교황청 앞 커다란 나무는 12월인데도 가을색으로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입장권 끊는 곳에서 태블릿 PC를 꼭 받아서 관람하시기를 권한다. 무료이고 한국어 서비스는 안되지만 영어로 들을 수 있다. 태블릿 PC를 벽에 비추면 중세시대 모습을 3D 증강현실로 볼 수 있다.


아비뇽 교황청은 교황의 아비뇽 유수부터 프랑스 왕권과 로마 교황권의 대립으로 가톨릭 교회가 로마와 아비뇽으로 분열했던 시기동안(1309년~1377년) 7명의 교황이 살았던 고딕양식의 교황 궁전이다.


교황청 안에는 연회실, 기도실, 예배실, 회랑, 주방 등 20개가 넘는 방이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 병영으로 사용하였고 19세기에는 감옥으로도 사용하면서 성상과 장식품 등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교황청 앞에서는 매년 7월 아비뇽의 역사를 재조명한 '송 에 뤼미에르'('소리와 빛'이라는 뜻) 등의 세계적인 예술축제가 개최된다.


교황청 관람 마지막 공간에서 특별한 전시를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숲과 건축 풍경의 조화를 탐구해 온 에바 조스팽의 전시였는데 작업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을 보니 한 인간의 열정이 이룰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전시 작품은 우리에게 고대로 들어가서 산책을 하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교황청 전망대에 올라가면 론강과 아비뇽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아비뇽 대성당 Notre Dame des Doms d'Avignon

아비뇽 대성당은 교황청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탑 꼭대기에 황금으로 도금한 성모상이 있다. 대성당 내부의 여러 예술작품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14세기 고딕 조각 예술의 걸작품인 교황 요한 22세의 무덤이라고 한다. 부드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성모상이 이 도시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아비뇽 교황청에서 나와 골목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학생 같아 보이는 남성이 벽을 타고 내려온다. 벽의 높이가 상당해서 굉장히 위험해 보였는데 그는 늘 이렇게 외출을 했다는 듯이 자연스럽다. 마치 편의점에나 가야겠다. 하는 느낌으로... 우리가 걱정되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어도 태연하다. 능숙하게 한발 한발 디디며 내려온다.


어디다 신고를 해야 하나 뭐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래 너의 그 일상을 존중하마 혼자 중얼거리며 지나왔다.

잘 내려왔겠지...


프티 팔레 박물관 Musée Du Petit Palais

1976년에 개장한 이 박물관은 14세기 초 아비뇽 주교가 거주하던 건물이었다. 전시 작품은 이탈리아 및 프랑스 원시 또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작품 390점과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무덤에서 나온 조각상을 포함한 600개의 조각품이 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관람객이 아무도 없어서 고요속에서 아름다운 종교화를 마음껏 감상 할 수 있었다.


포르트 뒤 로셰 타워 Porte du Rocher Tower (바위 타워의 문)

중세 시대에 침략자들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요새이다. 생 베네제 다리를 찾다가 탑이 있어 들어갔는데 중간에 있는 다리로 나가는 문이 잠겨 있어 끝까지 올라갔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불어서 서있기도 힘들었지만 론강의 아름다운 전망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갑자기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서 철망 너무 포도밭에 떨어졌다.(그 덕분에 나중에 아비뇽에서 모자를 하나 샀는데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바람이 심해 언덕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려다 말았는데 나중에 보니 로쉐 데 돔이 그곳에 있었다. 영국식 정원이 있는 언덕 위 천연 요새 로쉐 데 돔을 못 본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생 베네제 다리의 원래 모습

생 베네제 다리 Pont Saint Bénezet (= 아비뇽 다리 Pont d'Avignon, )

론 강의 거센 흐름 때문에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곳에 성 베네제와 그의 제자들이 1177~1188년까지 11년 동안 건설했다. 이 다리는 론 강의 두 강둑을 연결하는 길이 920m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였는데 무너지고 훼손되어서 현재는 22개 아치 중 4개만 남아 있다. 그래서 생 베네제 다리를 통해서 론강 너머를 갈 수는 없다.


2번째 아치 위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생니콜라 예배당이 남아 있다. 다리 입구에 작지만 알차게 꾸며진 홍보관이 있다. 다리 끝에 가면 갑자기 길이 없다. 굉장히 이상했다. 평평하고 튼튼한 돌다리가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끊어진다. 우리 삶이 멈출 때 이런 느낌일까...


다리 위에서 보는 론강은 전망대에서 보는 조용하고 도도한 흐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강폭은 넓고 물의 흐름은 거세다. 다리를 놓기 어려웠을 것 같다.


이 아름다운 사진 한 장, 그냥 보고만 있어도 위로가 된다.


성당 앞 광장이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자매로 보이는 두 분이 이 풍경을 보며 즐 거운 듯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너무 행복해한다. 그리고 우리도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이곳이 너무도 아름답지 않냐고 감탄을 한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는 이곳을 찬찬히 다시 봤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지만 작은 정성들이 모여있는 이곳이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들에게 공감했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바람 불고 추운 날이었는데 당나귀, 토끼, 염소가 성당 앞 광장에 나와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만져보고 신이 났다. 성당 안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만든 물건과 작품들을 파는 마켓이 열리고 있다.


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정성스럽게 무언가를 준비하여 예수님 탄생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행복한 날이라는 것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아비뇽 중앙역

아비뇽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아비뇽 중앙역으로 왔다. 역은 일부가 공사 중이어서 복잡했다. 화장실을 찾다가 직원에게 물어보니 공사 중이라 없다고 한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 내부에 없다는 것이었고 화장실은 기차 타는 곳에 있었다. 한국말만 끝까지 들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





매주 목요일 연재하는 글입니다.

다음 글 "매혹적인 도시 파리"는 2.29(목)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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