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혹적인 도시 파리

친절한 사람들

by 정안

리옹역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파리 숙소로 가기 위해 볼트를 부르고 역 건물 밖으로 나갔더니 택시 승강장과 호객하는 사람들이 섞여 복잡했다. 우리는 볼트가 어디로 올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서 뭐라고 한다.

당연히 장거리 택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모른척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굉장히 미안해졌다. 다시 들으니 볼트를 기다리냐고 묻고 볼트는 이곳이 아니라 아래쪽 길가에서 타야 한다고 알려주는 거였다. 불트가 도착해서 허겁지겁 가느라 고맙다고 인사도 못했다. 너무 미안했다.


볼트를 타고 오는 내내, 한국에 돌아와서도 생각이 났다. 다시 돌아가서 고맙다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잊었을 수도 있지만 나 혼자 말해본다. 'Merci beaucoup'


볼트를 타고 숙소까지 왔다. 볼트기사는 젊은 흑인 남자였다. 그런데 그가 숙소 주소지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주고 바로 가지 않고 서성인다.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그는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이곳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이 아닌 사무실 건물이라 숙소라 할 수 없다. 숙소 주인과 연락은 된 거냐, 괜찮겠냐 이런 취지였다.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늦은 밤, 낯선 도시 파리에서 우리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다행히 건너편을 보니 숙소 주인이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숙소 주인이 나와있고 숙소는 바로 앞이라고 말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고맙다고 하자 그는 비로소 인사를 하고 떠난다.


숙소 주인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는 숙소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준다. 설명이 끝나자 그녀는 우리의 일정을 물어봤다. 파리에서 2박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우리는 마지막 날 일정까지를 보여줬다. 그녀는 놀라면서 파리 샤골 드골 공항은 몹시 복잡해서 숙소에서 3~4시간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조언이 없었다면 우리는 비행기를 놓쳤을 것이다.


밤늦게 도착한 파리에서의 첫날은 친절한 사람들이 있어 겨울도 봄 같았다.


'느슨한 관계'와 더 많이 상호작용해야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느슨한 관계란 카페에서 만난 바리스타,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 등과 같이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짧은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 김난도 등 6명 『트렌드 코리아 2024』


짐을 놓고 잠시 쉰 후 숙소를 나섰다. 생트샤펠 성당 입장과 오르세 미술관 가이드 투어를 예약한 상태여서 시간을 맞춰 가야 하는 기준점이 생겨버렸다. 남프랑스 때처럼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는 여행과는 다른 차원의 파리 여행이 시작됐다. '파리 자유의 여신상'이 첫 번째 목적지였다. 숙소가 파리 15구 컨벤션역 인근이어서 자유의 여신상까지는 걸어서 1시간 정도가 걸렸다. 파리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골목길과 시장, 관공서 앞을 지나 자유의 여신상에 도착했다.


시뉴섬으로 내려가기 전 다리 위에서 에펠탑이 보인다. 도시 한가운데 센 강이 흐르고 상징처럼 에펠탑이 서있다. 비로소 파리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파리 자유의 여신상 Statue de la Liberté Paris

센 강 한가운데에 3개의 섬이 있다. 그중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시뉴섬은 인공섬, 시태섬과 생루이섬은 자연섬이다. *시뉴섬(Île aux Cygnes, 백조 Cygnes의 섬 Île) : 프랑스어로 '백조의 섬'이라는 뜻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것이다. 이후 프랑스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유의 여신상을 센강 시뉴 섬에 세웠다. 1시간을 걸어왔는데 좀 허무했다. 센강 시뉴섬 공원 끝에 멀리 에펠탑을 등지고 자유의 여신상이 잊혀진 여인처럼 덩그마니 서있다.


미라보 다리 Pont Mirabeau

자유의 여신상에서 미라보 다리가 보인다. 시 한 편으로 유명해진 다리


미라보 다리 밑으로 센느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르네

기쁨은 항상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밤이 오고 시간이 울리고
세월은 가지만 나는 남아있네.


손에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 보며 서 있자.
마주 잡은 팔 밑으로
영원히 바라보기에 지친 물결이 지나가더라도


밤이 오고 시간이 울리고
세월은 가지만 나는 남아있네.


사랑은 이 물이 흐르는 것처럼 떠나가고
사랑은 떠나가네.


삶이 느린 것처럼
희망이 격렬한 것처럼
밤이 오고 시간이 울리고
세월은 가지만 나는 남아있네.


날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도
흘러간 시간과
떠난 사랑은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밑으로는 센느 강이 흐르네


밤이 오고 시간이 울리고
세월은 가지만 나는 남아있네.


-기욤 아폴리네르 "미리보 다리'


센 강변 산책로는 에펠탑을 보며 걸을 수 있다.


비르하켐 다리 Pont de Bir Hakeim

에펠탑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이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을 촬영한 곳이다. 다리의 2층은 메트로가 지나가고 사람들과 자동차는 1층으로 오고 간다. 프랑스에 와서 한국인을 가장 많이 본 곳이다. 젊은 연인들이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곳곳에서 들리는 한국어에 아는 척하고 반가워하고 머나먼 프랑스 파리에서 여행을 통해 만난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생트 샤펠 성당 입장시간에 맞춰 가려고 열심히 걸었다. 에펠탑도 지나고 퐁네프 다리도 지나고 아름다운 건물들을 빠르게 지나면서 보니 파리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었다.


생트샤펠 성당 Sainte-Chapelle

시테섬에는 생트샤펠 성당과 노트르담 대성당, 사법부 청사와 병원, 파리 경찰청사가 있다.

*시테섬(Île de la Cité, '도시'라는 뜻) : 센강에 있는 자연 섬


예약시간에 겨우 맞춰 왔는데 12월이라 여행 비수기인데도 줄이 길었다. 여행자처럼 보이는 이들은 세계 각 나라에서 온 듯 다양했다. 아름다운 하나의 성당이 세계의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았다고 생각하니 기묘한 감동 같은 게 느껴지려고 하는데 중국인 가족이 갑자기 통제선을 넘어 우리 앞쪽으로 끼어들었다. 두명의 아이들과 부부였는데 새치기를 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즐겁기까지 했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생트샤펠(Sainte-Chapelle)은 '성스러운 예배당'이라는 뜻이다.

13세기 고딕 양식의 왕실 예배당으로, 유물과 성경 속 장면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아름다운 곳이다. 넓지 않은 성당 안에 사람이 꽉 차 있었지만 스테인드글라스에 빠져 불편한 줄 몰랐다. 공간이 넓지 않고 사람이 많아 한곳에 서서 성당 안 스테인드글라스와 벽을 장식한 작품들을 자세히 보게 됐다.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있고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세심하게 만든 하나하나를 또다시 조화로운 전체로 만들었다. 신이 우리를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우리 눈에는 모든 인간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신의 눈에는 자신의 피조물들이 모두 아름다울 것이다. 그들이 조화를 이루어 내는 세상의 모습도.


오르세 미술관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서 시간에 맞춰 다시 가야 했다. 걷다 생각해 보니 점심을 못 먹었다.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오르세 미술관은 아르누보 양식의 웅장한 건물로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 건축가 빅토르 라루(Victor Laloux)가 만든 철도역이었다.


철도의 전동화에 따라 플랫폼이 좁아지게 되어 기능을 상실하고 허물어질 뻔했던 이 건축물은 1986년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대부분 1848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전인 1914년까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이 유명하다.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사진, 그래픽 아트, 가구, 공예품 등 19세기의 예술작품을 폭넓게 전시하고 있으며, 5층의 야외 테라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모습이 아름답다.

*루브르 박물관(기원전~19세기초 작품), 오르세 미술관(19세기~20세기초 작품)

퐁피두 센터(20세기초~최근까지의 작품)


겨울비가 이슬처럼 내리고 있었다.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유로 자전거나라 가이드와 참가자들을 만났다. 우리와 젊은 부부, 홀로 여행 온 청년(남), 또 홀로 여행온 청년(여).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이드 안내에 따라 들어가서 짐을 맡기고 투어를 시작했다.


1층, 관람이 시작되는 곳이다.

조각작품들의 배치를 보면 프랑스가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자유의 여신상이 보인다.


오르세 미술관 대형 벽시계를 안에서 보니 시간을 거슬러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설명을 들으니 하나의 그림에 이야기가 가득했다. 알고 나면 보인다는 말은 진리다.


프랑스 대혁명이 생각나는 그림.


오페라 가르니에 건물의 모형(단면도)

오페라 가르니에는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 된 곳이다. 유령의 지하 은신처로 가는 물길도 오페라 가르니에에 실제로 있으며, 오페라의 유령이 요구한 5번 좌석이 지금도 비워져 있다고 한다.


오르세미술관에서 나와서 식사할 곳을 찾다가 바로 옆에 도서관 같이 생긴 건물이 있어 혹시 식당이 있을까 하고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가 훈장 박물관이었다. 세미나도 열리는 것 같고 공부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지하에 식당이 있어서 갔더니 마침 저녁식사 배식을 하고 있었다.


넓은 홀에 사람들이 꽉 차 있고 음식도 다양하고 맛있어 보였다. 줄을 서서 음식을 고르면서 뭔가를 물어보니 배식하는 직원이 이 건물에 근무하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했더니 근무자만 먹을 수 있는 식당이란다... 헐

우리는 아쉬워하며 담은 음식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나왔다.


주 정부 사무소 건물이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가


다운로드.jpg

에펠탑

프랑스의 건축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 (Alexandre Gustave Eiffel, 1832~1923)이 만든 거대한 철탑으로 1889년 5월에 개장했다. 에펠탑은 19세기 기술의 승리이자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고대로부터 줄기차게 건축에 적용된 규범은 에펠탑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대체되었다.


에펠탑에는 전망대가 세 곳 있다. 지상 57미터에 제1전망대, 115미터에 제2전망대, 274미터에 제3전망대가 있다.


에펠탑 예약을 하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2전망대 입장권밖에 없었다. 정상인 3전망대에서 시원하게 파리 야경을 보고 싶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예약시간에 맞춰 에펠탑에 오니 긴 줄이 서있다. 입장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전망대에서 내리니 다시 줄이 있어서 서서 기다렸다.


우리 차례가 되어 입장권을 보여주니 안내하는 직원이 이 줄은 3전망대로 가는 줄이니 들어갈 수 없다. 옆문으로 나가시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잠시 당황하고 미안해하면서 옆문으로 나가는데 그녀가 우리보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다. 긴 줄의 사람들이 다 올라가자 그녀가 우리에게 들어가라고 한다. 우리가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서있었더니 그녀가 말한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우리는 화들짝 놀라고 너무 기뻐서 메흐 씨 보꾸를 외쳤다. 들어가게 해 준 것보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말이 더 기분 좋았다. 우리는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라는 인사를 하고 올라갔다. 그녀의 미소가 출발하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보였다.


아름다운 세상이다.


사방을 둘러본다. 도시에 밤이 골고루 찾아왔다.

해가 지는 모습을 좋아한다. 하지만 도시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볼트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늦은 밤, 멀리 에펠탑이 보인다.




매주 목요일 연재하는 글입니다.


다음 글 "파리는 하나의 세계다"는 3.7(목)에 발행합니다.

keyword
이전 07화아비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