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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아를

겨울에 떠난 남프랑스

by 정안

아를(Arles)은 아비뇽에서 기차를 타고 16분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마르세유에서 기차를 타고 아비뇽 숙소에 도착한 것은 밤늦은 시간이어서 주변 풍경을 볼 수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내 사진 속에 우연히 들어가 계신 신사분의 뒷모습, 해 뜨는 풍경을 찍고 있는 듯하다.


아를역에 도착하니 시계가 9시 16분을 가리키고 있다. 역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론강이 있고 강을 따라 걸어내려가면 아를이 나온다.


아를은 프랑스 남동부 론 강 하류에 자리 잡고 있는 인구 5만 명의 도시이다. 고대 로마시대에 번성했던 곳으로 알프스에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론강을 끼고 발전했다. 로마 시기에는 원형경기장, 목욕탕 등 여러 건축물이 지어졌고 735년부터 4년간 아랍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855년부터 사실상 독립 왕국인 아를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9세기에 바이킹과 사라센 해적의 침공을 받으며 쇠퇴하였는데 로마 원형경기장 등 로마 및 로마네스크 건축물들이 남아 있어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를은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도시이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 2월부터 1889년 5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머물면서 '해바라기', '밤의 카페테라스', '노란 집',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여인, 지누부인' '아를의 도개교', '아를의 붉은 포도밭', '자화상(고갱에게 헌정), '아를에 있는 고흐의 방', '집배원 조제프 룰랭의 초상' 등 300여 개의 작품을 그린 곳으로 유명하다.


파리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빛과 푸른 하늘, 색채를 아를에서 마침내 찾아낸 고흐는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꽃과 나무, 바람, 별, 구름을 찾아다니며 좋은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지독한 외로움과 따돌림, 친구 고갱과의 다툼과 자해, 투병과 요양을 겪으며 인생의 가장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론강 Le Rhône

강가에 아침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넓은 강폭에 조용히 흐르는 강물, 화구를 짊어지고 이 강가를 걸어갔을 빈센트 반 고흐가 맞은편에서 걸어올 것만 같다.

아를 시가지 입구

흐린 겨울날이어서 상점의 불빛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겨울이고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방문객이 거의 없다. 휑한 거리가 오히려 아를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 준다. 다 나쁜 것도 다 좋은 것도 없다.


공화국 광장(레퓌블리크 광장, Place de la Republique)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1673년에 지은 아를 시청이고 시청 지하에는 지하 회랑이 있다. 오른쪽 건물이 생 트로핌 다를 성당, 왼쪽은 생트안느 교회이다. 광장 중앙에는 커다란 오벨리스크가 있다.

*오벨리스크 :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생트안느 교회

크리스마스 주간을 맞이하여 전시를 하고 있었다. 전시 입장료가 후원이 된다는 문구를 보고 들어갔다. 연세가 많은 마을 어르신들이 입구에 앉아 돈을 받고 입장표를 주는데 그냥 마을 공동체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살던 마을이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방문객이 많아지면서 마을 사람들도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게 된 그런 느낌.


예수님 탄생에 관한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남프랑스의 건물들은 밖에서 보면 창문도 거의 없고 답답할 것 같은데 안에 들어가면 의외로 개방감 있는 시원한 공간이 나와서 신기했다. 방문객이 아무도 없는 아침시간 나무 바닥을 조용히 내디디며 어릴 적 다녔던 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작품으로 보는 기분은 아련했다. 교회에서 주는 작은 과자하나에도 행복했던 그 시절 크리스마스 노래를 들으며 마음이 들떴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했을까.


Café Terrace at Night, 1888년

반 고흐 카페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의 배경. 카페는 문을 닫았고 천정에 있는 조화는 조악하고 창으로 들여다본 내부는 황량했다. 겨울이라 잠시 문을 닫은 것인지 안내문은 없었다. 방문객들은 문 앞을 서성이다 사진을 찍고 돌아선다. 바로 옆 초록색 카페에는 마을 사람들인듯한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노란색 반 고흐 카페와 색을 맞추어 초록으로 가게를 단장한 감각 있는 주인장!


카페 이름을 보다 문득, 생전에 빈센트 반 고흐는 고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그의 정식 이름은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성씨인 '반 고흐'의 '고흐'는 출신지이다.(그의 조상은 독일의 고흐라는 도시 태생). 그래서 반 고흐는 우리나라로 치면 김 씨, 이 씨 이렇게 부른 게 된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빌럼'이다. 하지만 빈센트라는 이름은 너무 많아 구별이 가지 않으니 반 고흐가 사람들에게 선택된 게 아닐까


Entrance to the Public Garden in Arles, 1888년

아를의 여름정원 Jardin d'été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공원 입구'의 배경인 공원이다. 중세 성벽에 기대어 있는 이 정원은 1864년 개장한 영국식 정원이다. 이에 대비되게 큰길 반대편에 프랑스식 테라스가 넓게 펼쳐진 겨울정원이 있었는데 1976년 없어졌다고 한다.


공원 입구에서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오고 갔는데 그중 한 명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웃으며 좋은 아침이라고만 했는데 그 말이 그렇게 따뜻했다. 마치 내가 동네사람인데 산책을 나왔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느낌 같은


공원에 들어서자 머리만 있는 고흐의 조각상이 놀란 듯 허공을 보고 있다.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의 햇살이 공원 바닥에 가득하다. 바로 옆에는 고대 극장이 있다.


Saint Charles school tower in Arles

생 샤를 중학교와 대학교

1469년에 지은 역사적인 기념물인 벨 타워(Villa Romana)가 있는 아름다운 학교이다. 앞을 지나는데 학교를 마친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가방을 멘 아이들이 나와서 집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이 낯선 듯 친근하다. 관광지로만 생각했는데 학교와 아이들이라니 훅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아를 원형경기장과 고대극장


아를 원형경기장 Arles Amphitheatre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 위해 원형으로 한 바퀴 돌았다. 아를 원형경기장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도시의 벽을 허물고 지은 원형극장이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영향을 받은 건물로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로마인들이 검투사들의 시합과 맹수들이 싸우는 것을 관람한 장소이다.


이곳은 로마시대가 끝나고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거주 공간으로 바뀌게 되어 원형극장의 모습은 그때 많이 훼손되게 된다. 이후 19세기에 유적지로 지정이 되면서 집을 철거하고 현재 원형 경기장으로 복원이 되었다.

현재는 투우 경기와 4월에는 부활절 행사, 7월과 9월에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장소가 되었다. 보존과 활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세계유산이다.


파리 뮤지엄패스처럼 아를 패스가 있어 15유로를 내면 8곳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원형경기장에 들어오니 고대로 들어간 듯 아득함이 밀려온다. 사람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전망이 좋은 위쪽 계단에 앉아 가지고 온 차와 간식을 먹고 있는데 소풍을 온 듯한 중학생 아이들이 단체로 들어오더니 여기저기 흩어져서 앉아 있다. 우리는 이 세계유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샅샅이 보고 있는데 아이들은 대충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거나 우리가 왜 여기에... 하는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래도 와서 주의를 주거나 야단을 치는 어른은 없다 자유롭게 있다가 시간이 되니 모두 나간다. 아이들의 인생에 고대 유적은 별 의미가 없는 법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맨 위쪽으로 올라가면 아를의 전경을 볼 수 있다.


통로를 걸어가면 사이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마을의 풍경이 보인다.



아를 고대극장 Théâtre Antique d'Arles

기원전 1세기말에 건축한 로마극장 유적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당시 극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관객이 앉는 반원의 공간인 카베아(cavea), 배우들이 연기를 선보일 무대, 그리고 아름답게 장식된 벽면이다.


카베아는 계단식 좌석으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이 좌석은 사회 계급에 따라 나누어졌다. 내부 계단 자리 나 오케스트라 자리에는 귀족이나 기사 등이 앉았다. 이곳에서 공연한 것은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희극, 비극과 같은 연극이었다. 현재는 계단 좌석 흔적과 아폴론에게 바쳐진 제단의 부서진 벽 일부와 무대를 꾸민 기둥 두 개가 남아있다.


계단에 앉아 있자니 대학 때 노천극장도 이와 비슷한 구조였다는 생각이 났다. 노천극장 맨 꼭대기에 앉아 있으면 교정 전체가 보였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시간이 갑자기 많아진 나와 친구들은 수시로 그곳에 앉아 지나가는 아이들을 구경하고 이런저런 몽상과 멍 때리기를 했다. 그곳에서 연극반 아이들은 때때로 공연을 하고

풍물패는 북과 장구를 치며 놀다 막걸리를 마시곤 했고 민주화를 위한 가두시위 출정식을 하기도 했다.


대학시절을 생각하면 노천극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곳은 우리들의 해방구였다. 지금 나의 해방구는 여행...


아를 마켓을 찾다가 발견한 추모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대로변 공원에 있었다.


"조국과 자유를 위해 싸우다 들판에서 죽은 자식들에게 감사하는 아를의 도시"

추모비는 추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문득 외신에 보도된 우리나라에 대한 묘사가 떠올랐다.

이태원 참사 이후 진실규명에 대한 보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거리에서 울부짖는 나라..." 가슴이 먹먹하다.


오후가 되자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에스파스 반 고흐 L'espace Van Gogh

빈센트 반 고흐가 정신적 문제로 입원 생활을 하던 병원으로 그가 남긴 그림 '아를 요양원의 정원'에 묘사된 모습을 바탕으로 당시의 병원과 정원을 복구해 놓은 곳이다.


이곳은 1573년에 세워진 아를의 오래된 병원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겨울부터 1889년 초까지 귀를 치료하기 위해서 이곳에서 입원했고, 당시 20대 인턴 의사였던 펠릭스 레이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고흐는 이런저런 문제로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정신병원으로 옮긴다.


1984년 병원이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문화공간이 된다. 사진전 전시공간, 미디어 도서관과 도시의 기록을 보관하는 곳으로 운영 중이다. 2019년 세운 반 고흐의 동상을 만날 수 있는데, 동상 뒤쪽 안내에 그가 여기 머무는 동안 병원 정원과 병실을 묘사한 2개의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젊은 엄마가 아기와 함께 천천히 산책을 하고 있었다.

분주하게 사진을 찍고 숙제를 하듯 코스를 돌아보던 나는 멈칫했다. 여행을 떠나온 이유를 잊은 건가... 오늘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여유롭게 앉아서 차 한잔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시 묻는다. 네 여행의 이유는 무엇인가...


전시회 안내문이 예뻐서 찍어 두었다. 에스파스 반 고흐 공간에서 하는 전시에 대한 안내문이다.

남프랑스 아를, 12월의 거리.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는 남프랑스의 12월은 꽃을 쉽게 볼 수 있다.


걸어 다니는 동안 곳곳에서 소박한 전시들을 만났다. 아를은 도시 전체가 문화공간이다.


생 트로핌 성당 Cathédrale Saint-Trophime

다시 공화국 광장(레퓌블리크 광장)으로 와서 성당에 들렸다. 오후가 되니 크리스마스 마켓이 문을 열고 광장은 훨씬 활기가 생겼다. 생 트로핌 성당은 프로방스 지방의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종교 건축물로, 입구와 회랑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12~14세기의 섬세한 조각들이 유명하다.


12세기 시작된 성당 건립 공사는 14세기까지 이어졌는데 고대 로마 극장들의 일부를 떼어내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프로방스 로마네스크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웅장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개축 작업으로 제단과 회랑에 고딕 요소가 일부 반영되기도 했다.


최후의 심판 장면을 묘사한 정면 입구, 기둥 사이사이에 채워져 있는 성인 조각상, 기둥 끝에 새겨진 성서 장면 등 건물 곳곳이 종교적 메시지가 담긴 조각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장식을 절제한 예배당 내부에는 아를의 주교였던 생 오노레(Saint Honoré, 350~429)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있다.


1840년 대성당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선정되었으며, 1981년 '아를의 로마시대 기념물'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아를 지하회랑 (cryptoporticus)

아를 지하회랑은 아를 시청((Hotel de Ville) 지하에 있다. 지하회랑은 기원전 로마인에 의해 건설된 U자형 지하 갤러리로 지하회랑의 지하 통로는 로마 광장(포럼)의 토대로 사용했다.

*포럼 : 로마 건축의 형식으로 일반적으로 공공 집회 광장을 의미


로마 광장(포럼)은 로마 도시의 정치적·상업적· 종교적 중심지이다. 포럼은 기원전 언덕 옆에 세웠으며 지하회랑을 짓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흙을 채워 땅을 고르는 작업을 해야했다. U자 모양의 지하회랑은 원통형의 아치 천장으로 덮인 이중 복도 3개로 이루어져 있고, 오른쪽 귀퉁이에서 둘로 갈라지며 삼중심 아치들을 떠받치는 거대한 원주들로 구분되어 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할 무렵 상점들이 바깥쪽에 들어섰다. 로마 및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념물로 1981년 이후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지하회랑은 혼자 갔으면 무서울 정도로 어둡고 공간이 많이 나누어져 있었다. 하지만 조명을 받은 그곳은 묘한 신비로움이 있었다. 이곳에서 기사단이나 종교적인 비밀회합을 했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우환 미술관 Lee Ufan Arles

남프랑스에 우리나라 작가의 갤러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웅장해지는 경험이었다.


이우환 갤러리는 2022년 4월 개관했다. 16~18세기에 지어진 ‘오텔 베르농(Hotel de Vernon)’ 대저택을 개조한 공간이다. 이 건물은 25개의 방이 있는 3층 주택으로 개조에는 안도 다다오가 참여했다고 한다. 1층에는 이우환 화백의 돌과 철로 된 작품 10점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이 화백의 회화 작품 30점이 전시중이다.


1936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이우환은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사물과 세계의 관계에 천착하면서 일본 아방가르드 운동 ‘모노하’를 주도했다. 모노하는 1960~70년대 콘크리트, 유리판, 강철 등 산업 재료와 돌과 나무를 결합한 작품을 선보인 미술 운동이다.


천천히, 조용히 보기에 좋은 미술관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그의 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길가의 녹슨 병뚜껑을 보고도 가슴이 뭉클해질 수 있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많은 예기치 않은 순간들,

찬란하거나 아름답거나 슬프거나 더러운 순간들이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짐을 반복한다.” (이우환)


빈센트 반 고흐 아를재단(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Fondation Vincent van Gogh Arles

반 고흐와 관련된 기념사업을 하는 비영리재단으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반 고흐와 현대작가들의 작품들을 함께 배치하는 전시들을 자주 선보이는 미술관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그것이 현재 창작물에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전시를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해설사가 설명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하는 손동작이나 표정으로 유추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별 기대 없이 미술관 옥상에 올라갔다가 아를의 붉은 지붕들 위로 해가 서서히 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콘스탄틴 목욕탕 Thermes de Constantin

기차역으로 가면서 본 론강의 고대 로마 공중목욕탕.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이 목욕탕은 로마인들에게 있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였다. 로마인들은 계층 또는 성별에 관계없이 목욕탕에서 휴식을 취하고 친구를 만났다.


남탕과 여탕이 따로 나뉜 구조는 아니며, 남자가 목욕하는 시간과 여자가 목욕하는 시간을 구분해 운영하거나 시대에 따라 두 성별이 함께 목욕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부유한 사람만 집에 목욕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대중목욕탕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론강에 석양이 드리운다. 오늘 하루치의 여행이 끝나간다.

론강에 앉아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렸을 고흐의 야윈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를 지금의 시대로 데려온다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겠지....


밤이 된 아를역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했던 아를역, 무언가를 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 마음을 안고 아비뇽 숙소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매주 목요일 연재하는 글입니다.

다음 글 "아비뇽"은 2.22(목)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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