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가르쳐준 존재의 언어
"아~ 우~"
친정 부엌에서 분유를 타고 있던 내 손이 멈췄다. 분명 아기 목소리였는데, 평소 듣던 울음소리와는 달랐다. 뭔가 의도가 있는 것 같은, 세상에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한 소리였다. 서둘러 거실로 가보니 아기가 할아버지가 놓아주신 모빌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우~ 으아~"
작은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졌다가 벌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해 보이던지, 마치 세상에 처음 도착한 존재가 이 낯선 곳의 언어를 배우려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아기 옆에 조심스럽게 앉아서 그 귀한 첫 옹알이를 들었다.
산후풍과 뇌경색 후유증으로 친정에 머물게 된 지 이제 두 달째였다. 남편과는 영상통화로만 아기의 모습을 전할 뿐,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기만큼은 날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 몇 달간은 울음으로만 의사표현을 했던 아이가 이제는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인 것이다." 아기의 옹알이를 듣고 있으니 그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직 의미는 없지만, 이 작은 존재는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언어 이전의 언어, 의미 이전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다.
"우리 OO이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말하자 아기가 눈짓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더욱 신이 나서 "아아~ 오오~"하며 열심히 떠들기 시작했다. 엄마도 부엌에서 나와 함께 들여다보며 "참 열심히 이야기하네."라며 웃으셨다.
그날부터 아기의 옹알이는 친정집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혼자 침대에서 "으아아~"하며 세상에 인사를 했고, 할머니가 수유를 도와주는 중간중간에도 "음음~"하며 뭔가를 말하려 했다.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 손자가 벌써 말을 하네"라며 흐뭇해하셨다.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옹알이를 들려주었다. 화면 너머 남편의 얼굴이 잠시 밝아졌다.
"우리 아기가 정말 잘 자라고 있네."
하지만 그 기쁨도 잠깐, 이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아기의 성장만큼은 함께 기뻐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통화를 끊고 나면 남는 것은 씁쓸함뿐이었다.
아기는 상황을 가리지 않고 옹알이를 했다. 기저귀를 갈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엄마가 팥찜질을 해주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특히 거울을 볼 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아바바~ 다다다~"하고 열심히 떠들었다. 그 순간 아기에게 거울 속 존재는 또 다른 친구였을 것이다. 나 역시 요즘 거울을 보면 낯선 사람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산후풍으로 수척해진 얼굴, 지친 눈빛. 이게 정말 나일까.
때로는 아기와 진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내가 "오늘 아빠한테 전화해볼까?"라고 말하면 아기가 "아아~"하고 대답하고, "그래? 아빠 보고 싶어?"라고 다시 말하면 "우우우~"하며 또 대답했다. 물론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옹알이를 듣고 있으면 언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남편과 나 사이에는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정작 진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반면 아기와 나 사이에는 의미 있는 단어 하나 오가지 않았지만, 마음과 마음이 닿는 것을 느꼈다. 언어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생후 5개월이 되어가면서 아기의 옹알이도 점점 다양해졌다. 처음엔 "아~ 우~" 정도였는데, 이제는 "바바바", "다다다", "마마마" 같은 소리도 냈다. 엄마는 "마마마"를 들을 때마다 "엄마라고 하는 것 같다"며 기뻐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소리에서 나를 부르는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아직 내 자신도 '엄마'라는 정체성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했으니까.
그런 어느 날, 평범한 주말 오후였다. 아기를 거실 매트에 눕혀두고 엄마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평소처럼 옹알이를 하며 팔다리를 바동거리던 아이의 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혹시나 해서 돌아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기가 엎드려 있었다. 분명 등을 대고 누워 있었는데.
"어머!" 엄마가 먼저 탄성을 질렀다. 나도 얼른 다가갔다. 아기는 자신이 해낸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모른 채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며 "아바바~"하고 자랑스럽게 옹알이를 했다. 마치 "할머니, 엄마, 봐! 나 이거 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뒤집기라는 것이 이렇게 감동적인 일인 줄 몰랐다.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강조한 "신체는 세계-속-존재의 근본적 양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기는 자신의 작은 몸을 통해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어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동작이지만, 아기에게는 온 힘을 다해 이뤄낸 첫 번째 대모험이었다.
저녁에 남편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다. 아기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뒤집기 성공!"이라고 메시지도 함께 보냈다. 한참 후에야 "우와 정말? 우리 아기 대단하다. 고생했어"라는 답장이 왔다. 아기를 걱정하는 마음과 나를 향한 위로가 섞인 메시지였지만, 어딘지 의무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나마 이렇게라도 소통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예전 같았으면 즉시 전화가 왔을 텐데.
성공한 그날, 나는 한참 동안 아기 곁에 앉아서 지켜봤다. 엎드린 채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계속 옹알이를 멈추지 않았다. 같은 거실이지만 아기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바닥의 질감, 매트의 색깔, 할아버지가 놓아주신 장난감들의 모양이 모두 새롭게 보였을 것이다.
그 작은 성취를 보며 나 자신을 돌아봤다. 아기는 매일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 어제는 새로운 소리를 배웠고, 오늘은 뒤집기에 성공했다. 그럼 나는 요즘 무엇을 시도하고 있을까. 남편과의 관계, 내 자신의 정체성, 앞으로의 삶에 대해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며칠 후부터는 뒤집기가 일상이 되었다. 어느새 능숙하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엎드렸다가 다시 돌아누웠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옹알이를 했다. 엎드려서는 "으아아~", 다시 누우면서는 "아바바~" 하는 식으로 상황에 맞는 효과음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아이에게는 '처음'이라는 게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면 그것은 곧 일상이 되고, 그 일상을 바탕으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한다는 것을. 어른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제 아기는 엎드려서 더 멀리 보려고 고개를 들고, 손이 닿지 않는 장난감에도 용감하게 손을 뻗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노력을 소리로 표현한다.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도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남편과의 관계는 여전히 어색하지만, 아기의 성장을 함께 지켜보며 우리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메를로퐁티가 말했듯이, 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아기의 작은 몸이 새로운 움직임을 배워가듯, 나와 남편의 관계도 새로운 움직임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기의 옹알이를 들으며 대화를 나누고, 뒤집기를 응원하며 작은 성취를 함께 기뻐하는 이 시간들이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다. 언어 이전의 소통, 의미 이전의 연결. 그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아기가 보여주는 용기와 호기심을 배우며, 나 역시 새로운 나를 발견해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