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풍, 그 춥고 아픈 계절
코로나에 걸린 바람에 조리원을 일찍 나와야 했다. 집은 아직 아기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남편이 미처 손대지 못한 곳곳이 어수선했고, 묵은 공기가 방 안에 고여 있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이었다. 햇살은 따스해 보였지만 바람만큼은 여전히 겨울의 차가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밀려들어왔지만 환기는 필요했다. 아기가 숨 쉴 공간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걸레를 물에 적셔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창틀의 먼지, 싱크대의 얼룩, 화장실 타일까지. 손이 시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때였다. 어느 순간부터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찬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문을 닫아도, 따뜻한 옷을 입어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마치 뼛속 깊은 곳부터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젖몸살이 심해 가슴에 냉찜질을 해둔 것도 화근이었을까. 가슴팍이 활짝 열린 듯한 느낌이었다. 온 세상의 바람이 나를 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산후의 몸이란 이렇게 약한 것이구나. 찬 기운에 이토록 무력한 존재가 되는구나.
그런 와중에 시댁 식구들은 아파트 1층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아기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소리 없는 영화 같았다. 아기를 번갈아 안으며 웃고 있었다. 아이는 그들 품에서 편안해 보였다.
내가 지방에서 그들을 부른 것도 사실이고, 코로나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목숨 걸고 왔는데"라는 말이 반복될 때마다 내 마음은 작아졌다. 감사해야 할 상황에서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배은망덕처럼 느껴졌다.
나는 혼자 집 안에서 청소를 계속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주워 담으며, 걸레로 구석구석을 닦아냈다. 몸은 점점 차가워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압박감, 깨끗한 집에서 아기를 키워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아무도 내 아픔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든 관심은 아기에게 향해 있었고, 나는 그저 투명한 존재였다. 원망스러웠지만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내 아기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은 우리의 첫 번째 우주"라고 했다. 그런데 내 몸이라는 집의 문이 활짝 열려버린 지금, 나는 어디서 따뜻함을 찾아야 할까. 봄을 들이려고 연 창문을 통해 오히려 내 안의 모든 온기가 빠져나가 버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친정으로 갔다. 시댁에선 "괜찮을 거야", "좀 쉬면 나아질 거야"라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내 몸은 그런 위로로는 회복되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도 온몸이 떨렸다. 히터 바람이 스쳐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느꼈다.
친정 문을 열자 엄마 얼굴이 달라졌다.
"어머, 너 많이 아프구나."
엄마는 산후조리를 철저히 한 사람이었다. 한 달 동안 씻지도 못하고 오로지 따뜻하게 지내며 몸조리에만 집중했다고 했다. 그런 엄마에게도 내가 겪는 산후풍은 낯선 것이었다. 이렇게 심한 경우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제대로 조리했는데도 이럴 수 있다는 게 엄마에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인터넷을 찾아보고, 이웃에게 물어가며 산후풍에 좋다는 방법들을 모두 찾아주었다.
아빠는 말없이 행동했다. 족욕물이 식기 전에 계속 갈아주었고, 내가 괜찮다고 해도 묵묵히 새 물을 준비했다. 엄마는 팥을 삶아 천에 싸서 찜질팩을 만들어주었다. 등에, 배에, 무릎에. 팥의 온기가 식을 때까지 계속 올려주었다. 그 온기가 스며들 때마다 눈물이 났다.
사랑이란 완벽한 이해가 아니구나 싶었다. 내 아픔을 정확히 모르더라도 곁에서 온기를 전해주는 것. 포기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것. 부모님의 손길 하나하나가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었다.
친정에서 보낸 한 달은 천천히 나를 되찾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아빠가 끓여주는 족욕물에 발을 담그며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엔 뜨거운 물도 차갑게 느껴졌지만, 점차 온기가 발끝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엄마의 팥찜질은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팥이 독을 뺀다"며 매번 새로 삶아주는 정성이 팥보다 더 따뜻했다.
몸의 회복만이 아니었다. 아기와의 시간도 달라졌다. 시댁에서는 아기 돌보기가 당연한 의무처럼 여겨졌지만, 친정에서는 온전히 나와 아이만의 시간이 되었다. 분유를 줄 때도, 기저귀 갈 때도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딸, 많이 아프구나."
아기를 재운 후 차를 마시며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엄마도 예전에 이런 적 있었어요?"
내가 물었다. 엄마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적 없었어. 조리도 철저히 했고, 한 달 동안 정말 몸조리만 했거든.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아플까. 코로나 때문에 조리원도 일찍 나오고, 바로 청소까지 해서 그런가 봐."
엄마의 말을 들으며 씁쓸했다. 결국 내가 조심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적어도 엄마는 내 아픔을 믿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
친정에서 보낸 한 달 반이 지나갈 무렵, 창밖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한 달 전 앙상했던 가지에 연두색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개나리가 노란 미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봄이 정말 왔구나. 내 몸 안에서도.
산후풍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찬바람이 불면 여전히 몸이 움츠러들었고, 비 오는 날엔 관절이 쑤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신호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몸이 차가워지면 따뜻한 차를 마셨고, 아플 때는 쉬었다. 완벽한 며느리, 완벽한 엄마가 되려던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아기도 자라고 있었다. 처음의 작고 연약한 모습에서 점차 표정도 풍부해지고 옹알이도 시작했다. 아이의 성장을 보며 나 역시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산후풍을 겪으며 더 강해진 게 아니라 더 유연해진 것 같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도움을 받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다.
어느 날 아기와 함께 찍은 셀카를 보내드렸을 때 시어머니가 "요즘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어이가 없었다. 사진 속 내 얼굴을 보고 하신 말이었을까, 아니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안 좋아 보였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 말을 듣고서야 느꼈다. 친정에서 받은 사랑의 온기가 아직도 내 안에서 꺼지지 않고 있다는 걸. 그 온기는 이제 아기에게로, 가족에게로, 언젠가 만날 다른 이에게로 전해질 것이다.
지금은 꽃잎이 떨어지는 시간이다. 꽃이 피고 지는 계절의 경계에서 나 또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출산이라는 거대한 문턱을 넘은 몸은 아직 새로운 균형을 찾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꽃샘추위처럼 예상치 못한 한기가 찾아와 몸을 뒤흔들었지만, 그것 역시 계절이 바뀌는 과정의 일부였다.
산후풍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추위는 단순한 몸의 아픔이 아니었다. 모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겪는 존재의 떨림이었다.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듯 과거의 나도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 자리에 새로운 나를 세워가는 것, 그것이 이 춥고 아픈 시간의 의미였을 것이다.
산후풍과의 사투는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몸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그 기억은 되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안다. 그 아픔도 나의 일부이며, 그것을 견뎌낸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찬바람은 여전히 내 몸을 스쳐 지나가지만, 이제 그 추위를 견딜 온기가 있다. 부모님이 내 안에 켜둔 작은 불씨가 있다. 꽃잎이 떨어지고 새잎이 돋듯, 고통 뒤에는 반드시 성장이 따라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