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너머의 간섭들
친정에 와서 지내는 동안 카톡 알림이 하루 종일 울렸다. 시어머니랑 시누이들한테서 계속 메시지가 왔다. 처음엔 아기 궁금해서 그러는 거겠지 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아니었다.
"아기 배 따뜻하게 해줘야 해. 배 차면 배탈 난다."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어요."
"그래도 더 해줘. 내가 애 셋 키워봤는데."
시어머니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기 경험을 내세우면서 모든 걸 판단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해도 "그래도"라는 말로 시작하는 반박이 돌아왔다. 마치 내 대답은 틀렸고 자기 말만 옳다는 식이었다.
큰시누이도 끼어들었다. 시누이들은 나보다 한참 위인 분들인데 미혼이다.
"분유 아직도 시간 맞춰서 줘? 너무 숫자에 연연하지마"
애 키운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잘 아는 척하는지 모르겠다.
"3시간마다 주라고 소아과에서 그랬어요."
내가 답했더니 "그래도 너무 기계적으로 하지 마. 아기가 원할 때 주면 돼"라고 했다. 그러면서 또 "근데 너무 자주 주면 배탈 날 수 있어"라고 덧붙였다. 소아과 의사 말보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는 식이었다.
인터넷에서 본 정보들을 마치 자기가 경험한 것처럼 말했다. "이런 분유가 좋다더라" "저런 젖병이 인기라더라" 하면서 링크까지 보내줬다. 나이 많다는 이유로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행동했다.
둘째 시누이는 더했다.
"내 친구도 애 낳고 아팠는데 다들 그런 거야. 시간 지나면 괜찮아져."
뇌경색으로 쓰러진 거라고 분명히 얘기했는데도 그냥 흔한 산후조리 문제 취급했다.
"진짜 심각한 건 아니었지? 요즘 여자들 다 예민해져서..."
이런 식으로 내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기 친구들 얘기를 계속 들먹였다. "○○이도 그랬어" "△△이는 더 심했어" 하면서 내 상황을 가볍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유난 떠는 것처럼 만들었다.
제일 속상한 건 아무도 내 안부는 안 묻는다는 거였다. 병원에 입원까지 했는데 관심은 아기한테만 있었다.
"아기 분유 좀 더 줘. 표정이 불만스러워 보이잖아."
"잘 자?"
"몸무게는 얼마나 늘었어?"
"기저귀 얼마나 자주 갈아줘?"
"목 가누는 거 연습시키지마, 아기 힘들어."
나한테는 묻지 않았다. 마치 내가 아기를 키우는 기계인 것처럼. 내 존재는 아기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가끔 "몸은 어때?"라고 물어봐도 형식적이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기가 더 중요해. 아기 건강해야 엄마도 건강한 거야"라고 말했다.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엄마가 건강해야 아기도 건강한 건데 말이다.
사진 공유 앱에서는 더 심했다. 아기 사진 하나 올리면 댓글이 우수수 달렸다.
"우리 새끼 너무 예쁘다!"
"이 옷 어디서 샀어?"
"눈이 누구 닮았나?"
"입술은 누구 쪽인가?"
"표정이 영특해 보여."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 칠 것 같아."
내가 대댓글을 안 달아도 자기들끼리 계속 댓글을 달았다. 아침에 사진 하나 올렸다가 저녁에 보면 사진 한 장에 댓글이 열 개 넘게 달려 있었다. 시어머니가 "귀엽다." 하면 큰시누이가 "정말 예쁘다.", 둘째 시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졌다. 마치 댓글 달기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아기가 우는 사진을 올렸을 때가 문제였다. 처음에는 "우는 모습도 예뻐."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곧바로 다른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아기가 왜 울어? 배고픈 거 아니야?"
"분유 충분히 주고 있어?"
"우는 게 많으면 뭔가 부족한 거야."
"아기들은 이유 없이 울지 않거든."
"혹시 아픈 건 아니야? 병원 갔다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우는 사진 하나로 나와 우리 엄마를 못된 사람, 자격 없는 사람, 인색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마치 우리가 아기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아기가 우는 이유가 100% 돌보는 사람 탓이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웃긴 건 아기한테 해준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옷 한 벌, 기저귀 한 팩, 분유 한 통도 사준 적 없다. 출산 선물조차 없었다. 그러면서 계속 지시만 했다.
"아기 옷은 좋은 걸로 입혀야 해. 피부가 예민하거든."
"분유도 비싼 걸로 먹여. 영양 성분이 다르대."
"장난감도 일찍 사줘야 해. 발달에 도움 된다고."
"유모차도 좋은 걸로 사야 해. 아기 척추에 영향 간다고."
돈은 내가 쓰고 지시만 받는 기분이었다. 임신했을 때 생각해보니 과일 한 조각도 안 사줬다. 미역국을 끓여준 적도 없고, 몸조리 용품 하나 챙겨준 적도 없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이든 사줄 수 있다는 듯이 떠들어댔다.
"우리도 뭔가 해주고 싶은데..." 이런 말은 자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했다. 말만 있고 행동은 없었다. 몇 달이 지나도 해준 건 여전히 없었다.
푸코라는 철학자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한 파놉티콘이 생각났다. 감옥에서 간수가 죄수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시설 말이다. 멀리 있으면서 카톡이랑 사진 앱으로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내가 뭘 먹이는지, 뭘 입히는지, 어떻게 재우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밤늦게 올린 사진에는 "이 시간에 왜 안 재워?" 이런 댓글이 달렸다. 사진에서 뭔가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연락이 왔다.
"아기가 좀 말라 보이는데 분유 양 늘려봐."
"옷이 너무 얇은 것 같은데"
사진 한 장으로 모든 걸 판단했다. 의사도 아닌데 사진만 보고 진단을 내렸다.
점점 지쳤다. 사진 올릴 때마다 무슨 말 들을지 걱정됐다. 아기가 예쁘게 나온 사진만 골라서 올리게 됐다. 우는 사진이나 잠든 사진은 올리기 무서웠다. 또 뭔가 지적받을까 봐서. 자연스러운 아기 모습 대신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다.
결국 남편한테 부탁해서 사진을 전달하게 했다.
"오빠가 전달해줘. 나 너무 스트레스받아."
그런데 남편은 전달 자체를 안 했다. 내가 계속 말해야 겨우 한두 장 전했다. 그것도 며칠 늦게. "나중에 할게."라고 하다가 까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럼 시댁에서 뭐라고 했냐면 "며느리가 연락도 안 해." "관심도 없나 봐." 이렇게 나왔다. 결국 내가 또 뭔가 잘못한 사람이 됐다.
남편한테 말해봤다.
"가족들한테 좀 말해줘. 너무 스트레스받는다고."
그랬더니
"뭔 스트레스야. 관심 가져주는 거잖아"라고 했다. 이해를 못 했다. 남편에게는 그냥 가족의 사랑으로 보였나 보다.
제일 화나는 건 우리 부모님한테 하는 태도였다. 밤낮으로 아기 봐주시는데 마치 제대로 못 돌본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하나하나가 다 지시였다. 아기를 전적으로 돌봐주시는 분들한테 뭔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심지어 어린이집 원장인 분을 초보자 취급했다.
나는 그냥 참을 수 있었다. 나한테 관심 없는 것도, 내 아픈 거 몰라주는 것도. 근데 부모님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얼마나 잘 돌봐주시는데. 밤에 아기 울면 나보다 먼저 일어나시고, 기저귀 갈아주시고, 분유도 타주시고. 그런 분들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도대체 뭔가 싶었다.
핸드폰 보는 게 스트레스가 됐다. 알림 울릴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또 뭔가 들어왔나 싶어서. 사진 올리기도 부담스러워졌다. 불평 담긴 댓글이 달릴 게 분명하니까.
요즘 세상이 이상하다. 예전엔 멀리 살면 간섭 안 받았는데, 이제는 핸드폰으로 언제든 참견할 수 있다. 거리가 소용없어졌다. 서로가 머무는 곳이 몇 시간 거리인데도 매일 얼굴 보는 것처럼 간섭받았다.
답장하기 싫어서 안 하면 또 뭐라고 했다.
"연락도 안 해."
"관심도 없어."
"아기 사진도 안 보내줘."
어떻게 해도 뭔가 들었다. 답장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였다.
핸드폰을 아예 안 봤다. 몇 시간씩. 그러면 메시지가 쌓여 있었고, 또 스트레스였다. 감시받는 기분이었다.
친정에서 쉬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피곤했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계속 시댁 눈치 보고 있었다. 진짜 쉴 수가 없었다. 아기 사진 찍을 때도 "이거 올려도 될까?" 생각하게 됐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며느리 생활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예전에는 시댁 식구들과 멀리 살면 자유로웠는데, 이제는 핸드폰으로 24시간 연결되어 있다.
이게 요즘 며느리들이 사는 방식인가 보다. 멀리 살아도 자유롭지 않다. 카톡 한 줄, 댓글 하나가 하루를 좌우한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더 통제받게 됐다.
나는 그냥 아기 돌보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기 엄마로만 있었다. 그것도 제대로 못 한다는 소리 들으면서.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기한테 좋다고 하면 무조건 따라야 했다.
가끔 반박하면 "아기를 위해서인데 왜 그래?"라고 했다. 아기를 방패막이로 썼다. 아기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걸 정당화했다. 설령 그들의 말이 틀렸어도 "아기를 위해서"라고 하면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푸코의 파놉티콘 이론을 생각해보면, 감시하는 사람이 실제로 지켜보고 있는지 모르지만 감시당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시댁 식구들이 실제로 24시간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언제든 메시지가 올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위축됐다.
자유란 무엇일까. 물리적 거리는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았다. 마음의 자유, 선택의 자유, 판단의 자유. 이 모든 것이 핸드폰 하나로 박탈당했다. 내가 아기를 어떻게 키울지, 무엇을 입힐지, 언제 재울지 하는 기본적인 결정권마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어쩌면 이것이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기술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거라고 했는데, 오히려 더 촘촘한 감시망을 만들어냈다. 예전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은 집에 살아야 갈등이 생겼는데, 이제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도 실시간으로 간섭받는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인정이었다. 내가 아기를 잘 돌보고 있다는 인정, 내 판단을 믿어준다는 인정, 내가 엄마로서 충분하다는 인정. 하지만 받은 건 끊임없는 지적과 간섭뿐이었다.
언젠가는 이 상황이 끝날까. 아기가 커도 계속일까. 유치원 갈 때도 "이 유치원이 좋대" "저 학원을 보내야 해" 이럴 것 같았다.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푸코는 또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도 권력의 일부"라고 했다. 내가 답장을 늦게 하거나 핸드폰을 끄는 것도 일종의 저항이지만, 그것조차 그들의 통제 안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해방은 무엇일까.
그때는 그냥 견디고 있었다. 핸드폰 알림 끄고, 답장도 늦게 하고.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적당히 거리두면서.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 같았다. 이게 현실이니까.
그래도 한 가지 깨달은 건 있다. 나도 언젠가 시어머니가 될 거라는 것.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할 수 있을까. 며느리의 자율성을 인정해줄 수 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
결국 이 모든 건 사랑에서 시작된 것 같다. 왜곡되고 통제적이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통제가 때로는 진짜 사랑보다 더 해롭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한 사랑은 신뢰다. 상대방을 믿고 존중하는 것.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 실수할 권리, 배울 시간,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것. 그런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받은 건 조건부 사랑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간섭받으면서 아이를 키워야 할까. 내 아이도 나중에 이런 가족 관계를 보고 자랄까. 건강한 경계를 배우지 못할까.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이것도 내 삶의 일부니까. 완벽하지 않지만, 이 속에서도 내 방식을 찾아가야 한다. 조금씩이라도 나만의 육아 철학을 만들어가고, 아이에게는 더 나은 가족 문화를 물려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 아기 엄마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나다. 나만의 생각과 감정이 있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그것만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술은 계속 발달할 것이고, 감시는 더 정교해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에 대한 욕구도 그만큼 강해질 것이다. 언젠가는 더 나은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때까지는 견디면서, 배우면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