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 속에 담긴 어제들
친정 안방 구석에 쌓여 있던 아기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후 5개월이 된 아들은 이제 80사이즈를 입고 있었고, 그보다 작은 옷들은 한참 전부터 서랍 깊숙이 밀려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이 옷들 정리해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후조리로 친정에 머물게 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엄마의 집에서 뭔가를 할 때는 허락을 구하는 습관이 있었다.
"당연하지. 같이 할까?"
엄마가 흔쾌히 대답해줬다.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것은 신생아용 배냇저고리였다. 손바닥만 한 그 작은 옷을 펼쳐보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이렇게 작네요."
내가 새삼스럽게 감탄하듯 말했다. 엄마는 그 옷을 만져보시며 "그럼, 너도 이랬어. 아니, 더 작았지"라고 웃으셨다.
사실 이 배냇저고리는 몇 번 입혀보지도 못했다. 신생아 기간 후반에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기가 먼저 친정으로 와서, 그때부터는 엄마가 더 편하다며 다른 옷들을 주로 입혀주셨으니까.
"이 옷은 진짜 몇 번 못 입었네."
내가 아쉬워하자 엄마가 말씀하셨다.
"괜찮아. 어차피 신생아 때는 금세 지나가거든. 중요한 건 아기가 건강하게 잘 컸다는 거지."
처음으로 엄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동안은 엄마가 아이 돌보는 걸 도와주시거나 내 몸조리를 챙겨주시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렇게 나란히 앉아 옷을 정리하며 경험을 나누니 뭔가 달랐다.
70사이즈 우주복을 들어올리자 엄마가 "아, 이거 내가 사준 거네"라고 하셨다.
"처음엔 너무 컸잖아. 소매 접어서 입혔는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가 계속 말씀하셨다.
"네가 어렸을 때도 옷이 큰 게 싫어서 자꾸 사이즈 맞는 걸로 사주고 싶었는데, 어른들이 그러시더라. 아이 옷은 좀 큰 게 낫다고."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내가 물었다.
"그럼, 옷 사러 가면 다들 그러더라. 큰 걸로 사라고. 그때는 왜 이렇게 큰 걸 자꾸 권하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다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어. 아이들은 정말 빨리 크거든."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아기 옷을 하나씩 들여다보니 그 말이 실감났다. 이 작은 천 조각들은 그저 옷이 아니라 시간의 증거였고, 성장의 기록이었다. 같은 옷을 보고 있지만 이제는 전에 없던 의미들이 보였다. 미래가 움트고 있었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아기 옷을 정리하는 그 순간에 엄마의 과거와 나의 현재, 그리고 아들의 미래가 모두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파란색 셔츠를 꺼내자 엄마가 "이거 입고 처음 공원 갔을 때 정말 예뻤는데"라고 말했다. 엄마에겐 그날이 소중했나보다.
"엄마가 사진도 많이 찍어주셨죠."
"그럼, 너희 아빠도 그렇게 좋아하시더라. 처음으로 밖에 나간 손자를 보면서."
문득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엄마는 저 키울 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엄마가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하더니 말씀하셨다.
"뿌듯하면서도 좀 섭섭했어. 네가 자랄 때마다. 아, 이제 더 컸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전 모습이 그리워지고."
"많이 아쉬웠어요?"
"응. 작을 때가 지나가버린 것 같아서. 지금도 그래. 우리 손자가 빨리 크는 게 기쁘면서도 아까워."
옷장 깊숙한 곳에서 내가 태교를 할 때 직접 뜬 롬퍼와 양말을 발견했다.
"어머, 이거 네가 뜬 거구나. 그때 얼마나 열심히 떴는지."
엄마가 조끼를 들여다보시며 말씀하셨다.
"삐뚤삐뚤해도 정성이 들어가 있어서 참 예뻤어."
"엄마는 저보다 뜨개질 훨씬 잘하시잖아요. 가르쳐주시려고 했는데 제가 안 배우려고 했죠."
그때 생각이 났다. 엄마가 뜨개질을 가르쳐주시려 할 때마다 나는 재미없다며 피했었다.
"지금이라도 배우고 싶으면 가르쳐줄게. 우리 손자 옷도 떠주고."
크기별로 분류를 하면서 엄마와 나는 계속 이야기했다. 아이의 성장 과정, 내가 어렸을 때 이야기, 엄마가 처음 육아할 때의 경험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네가 처음 뒤집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어. 신기하고 대견하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근데 그때는 혼자 감동했어. 아빠는 바빴고, 할머니는 당연한 거라고 하시고."
"지금은 다르죠? 저도 있고, 영상도 찍어서 아빠한테 보내고."
내가 말하자 엄마가 웃으셨다.
"그러게. 지금이 더 좋은 것 같아. 너랑 함께 보니까."
옷들을 박스에 정리하면서 엄마가 말씀하셨다.
"이 옷들 다음에 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잘 보관해두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엄마의 그 말이 다른 의미로 들렸다. 다음에 또 손자가 생길 거라는 뜻이 아니라, 이 옷들처럼 우리의 관계도 언젠가 다시 꺼내서 들여다볼 소중한 추억이 될 거라는 뜻 같았다.
"엄마, 앞으로도 이렇게 같이 이야기해요."
내가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 많이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아?"
엄마가 미소지으셨다.
정리를 마치고 보니 세 개의 박스가 나왔다. 신생아용, 60사이즈, 70사이즈. 하지만 가장 소중한 건 이 옷들이 아니라, 옷을 정리하면서 엄마와 나 사이에 쌓인 새로운 추억이었다. 그동안 서로 조심스러워했던 우리가 드디어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
아이는 그때 거실 한가운데서 앉아서 딸랑이를 흔들고 있었다. 초록색 티셔츠 소매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아이는 그때 거실 한가운데서 앉아서 딸랑이를 흔들고 있었다. 초록색 티셔츠 소매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작아진 옷들을 정리하면서 깨달았다. 성장이란 아이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 역시 엄마가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고, 나의 엄마와의 관계도 새로운 모습을 띠어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그냥 딸과 엄마였다면, 이제는 함께 아이를 키우는 동반자 같은 느낌이었다. 옷 정리라는 소소한 일상을 통해 우리는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