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부부 싸움
꽃은 꽃대에 의지해 피어난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그 든든한 줄기가 있기에 꽃은 고개를 들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결혼 전, 그가 내게 했던 모든 약속들이 그 꽃대처럼 단단할 거라고 믿었다.
"뭐든 함께 할게. 네 편이 될게."
그의 말들은 따뜻했고, 나는 그 따스함에 기대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임신이라는 소식과 함께 우리는 부모가 될 준비를 했다. 아니, 나만 준비를 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균열은 작았다.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가 방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딸깍. 그리고 긴 침묵.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책을 읽는 건지, 누워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혼자 있고 싶은 건지.
나는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임신으로 무거워진 몸을 소파에 기댄 채. 배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무렵의 하늘은 아름다웠는데, 그 아름다움을 함께 볼 사람은 방 안에 있었다.
괜찮아.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곧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만의 시간은 사치가 될 테니까. 지금 충분히 쉬라고 해야지.
하지만 출산 한 달을 앞두고 그가 말했다.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어."
그 말은 예고 없이 날아온 돌멩이처럼 내 가슴을 쳤다. 지금? 지금 그런 말을?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아기는 곧 세상에 나올 텐데. 나는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배 속의 아이를 감싸안으며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꽃대에 첫 금이 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이 금인 줄 몰랐다.
출산 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코로나에 걸렸고, 산후풍이 찾아왔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다 뇌경색 진단을 받았고, 뒤이어 갑상선암까지. 내 몸은 전쟁터였고,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그때 필요했던 건 약도, 치료도 아니었다. 아니, 그것들도 필요했지만 가장 절실했던 건 그의 손이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괜찮다는 눈빛 하나. 그저 내 옆에 있어주는 것.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만든 3:1의 구도 속에서 그는 어디에도 서지 못했다. 중재는커녕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나를 향한 그녀들의 지적질과 간섭 앞에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때로는 그녀들 편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혼자 이 싸움을 해야 하는지.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하나의 팀이 되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나는 혼자인지. 왜 그는 나를 지켜주지 않는지.
"나도 산후우울증이 있어."
그가 말했다.
잠깐, 뭐라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한 거지? 산후우울증? 남자가? 출산하지도 않은 사람이?
아, 그래, 들어본 적은 있다. 남성 산후우울증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육아의 부담과 역할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학술적으로는 인정된 개념이라고.
하지만 지금? 여기서? 이 타이밍에?
코로나에 걸려 갓 태어난 아이와 떨어져야 했던 나였다. 산후풍으로 온몸이 얼어붙어도 아기를 안아야 했던 건 나였다. 뇌경색 진단을 받고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일어서야 했던 건 나였다. 갑상선암 수술 날짜를 잡으면서도 "아기는 누가 돌보지?"를 먼저 걱정했던 것도 나였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동안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공격을 혼자 받아냈던 것도 나였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산후우울증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니, 실제로 웃었는지도 모른다. 허탈한 웃음. 어이없는 웃음. 이게 코미디인가 싶은 웃음 말이다.
아기를 낳은 것도 아니고, 몸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외롭게 싸운 것도 아닌 사람이.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사람이, 아니 제대로 지켜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자신도 우울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것은 고백이 아니라 회피였다. 도망이었다. 산후우울증이라는 네 글자 뒤로 숨어버리려는 비겁한 시도였다. "나도 힘들어"라고 말하면, 내가 더 이상 그에게 요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나도 아파"라고 말하면, 자신의 무책임이 정당화될 거라고 믿은 걸까.
가장 어이없었던 건 그의 표정이었다. 진짜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는 듯한, 그 순진한 눈빛. 정말로 자신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죽을 뻔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지지 한 번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은 없이 오직 자신의 어려움만 보이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진짜 모르는구나. 자신이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외면했는지, 무엇을 회피했는지. 진심으로 모르고 있구나.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악의보다 무지가 더 잔인하다는 걸 그때 배웠다.
어느 날 아침, 그가 회사에 간 후였다.
집은 고요했다. 나는 침대에 앉아 베개를 입에 꽉 눌렀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베개 속으로 삼켜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얼마나 소리쳤을까. 목이 쉬도록,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소리를 질렀다. 몸 안에 쌓인 모든 것들이 그 소리를 타고 흘러나갔다. 분노, 슬픔, 배신감, 외로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까지.
그러고도 가라앉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양손을 교차해 어깨를 두드렸다. 토닥토닥. 나비가 날갯짓하듯 부드럽게. EMDR 치료법이라고 했던가. 스스로를 달래는 법이었다.
참 서글펐다. 남편에게 받아야 할 위로를 스스로에게 주고 있다는 것이. 토닥여줘야 할 사람이 토닥임을 받아야 하는 역설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깨졌다는 것을.
배신감이 밀려왔다. 결혼 전, 그토록 다정했던 사람이 어디로 간 걸까. 모든 걸 걸고 약속했던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180도로 달라진 그를 보며 나는 낯선 사람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내가 본 것이 환상이었을까. 결혼 전의 그는 연기였고, 지금의 그가 진짜일까. 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로웠다. 한 집에 살면서도, 한 아이의 부모이면서도, 이렇게 외로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곁에 있어도 닿지 않는 사람.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사람. 그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밤에 누워 있으면 등을 맞대고 자는 우리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이렇게 멀다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 그 짧은 거리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아플 때, 가장 힘들 때, 개만 쓰고 돌던 그. 감정적 지지는커녕 자신의 우울을 앞세우던 그. 나는 그가 미웠다. 동시에 나 자신도 미웠다. 이런 사람을 선택한 나 자신이. 이런 상황을 견디고 있는 나 자신이.
서운함이 깊어졌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사과를 듣지 못했다. "미안해"라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니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걸까. 때로는 그것이 더 화가 났다. 무지가 악의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꽃은 꽃대가 흔들리면 함께 흔들린다. 어쩔 수 없다. 꽃대에 의지해 피어난 꽃이니까.
나는 그에게 의지했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단단한 줄기가 되어줄 거라 믿었다. 바람이 불어도, 폭풍이 와도, 그 꽃대만 있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꽃대가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몸을 피하려 휘어졌다. 꽃을 지탱하기보다 자신을 먼저 구부렸다.
그래서 꽃도 흔들렸다. 크게, 격렬하게. 떨어질 것처럼.
식물학자들은 말한다. 꽃대가 부러지면 꽃은 시든다고. 하지만 나는 시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다. 꽃대가 아닌 다른 것에 기대는 법을. 땅에 더 깊이 뿌리내리는 법을.
지금 돌이켜보면, 그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를 분리시켰다. 물리적으로는 여전히 한 집에 살지만, 정서적으로는 이미 다른 곳에 있다. 부부라는 이름은 남아 있지만, 실상은 독립적인 두 개체일 뿐이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기대지 않는다. 꽃대가 흔들리면 꽃도 떨어진다는 걸 배웠으니까. 차라리 땅에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니까.
그것이 슬픈지, 현명한 선택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다.
꽃대가 흔들리는 시간을 겪고 나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도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라는 것.
바람이 분다. 꽃대는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것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내 안의 뿌리든, 땅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듯, 꽃대가 흔들리는 시간에도 무언가는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일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것은 오롯이 내가 키워낸 것이리라는 점이다.
나는 아이를 안고 창밖을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저 나무들도 각자의 폭풍을 견디고 있겠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를 더 깊이 내리면서.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것이다.
아이가 내 품에서 작은 소리를 낸다. 이 아이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꽃대가 되어주고 싶다. 아니, 꽃대가 아니라 땅이 되어주고 싶다. 깊고 단단한 땅. 그 위에서 이 아이가 자신만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그것이 내가 이 시간을 견디는 이유다. 흔들리는 꽃대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버티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