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대가 흔들리는 시간(2)

SNS 속 행복한 엄마들

by 제이엘

친정 집 작은 방에 누워 있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잠들어 있고, 나는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산후풍으로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바람이 내 안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폰을 들었다.


남편에게서 연락이 올까. 무심코 카카오톡을 켰다. 아무것도 없었다. 문자를 확인했다. 역시 없었다. 통화 기록을 들여다봤다. 내가 건 전화만 남아 있었다.


폰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그리고 또 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아니 분명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부 한 마디. "괜찮아?" 한 줄. 그거면 되는데.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인스타그램을 켰다.

화면이 밝아지자 세상이 펼쳐졌다. 아니, 다른 사람들의 세상이 펼쳐졌다.


첫 번째 사진. 한 여성이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웃고 있었다. 화사한 미소, 윤기 나는 피부, 단정한 머리. 옆에는 남편이 서서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해시태그가 달려 있었다.

#출산 #가족사진 #행복 #감사 #아내바보


스크롤을 내렸다.


두 번째 사진. 만삭 사진이었다. 흰 원피스를 입은 임산부가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석양을 배경으로. 남편이 뒤에서 안고 있었다. 완벽한 구도, 완벽한 조명, 완벽한 행복.


나는 만삭 사진이 없었다. 조산으로 한 달 동안 입원해 있었으니까. 병원 침대가 내 만삭의 배경이었고, 링거줄이 내 악세서리였다.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끝없이 이어지는 행복한 장면들. 아기를 목욕시키는 남편, 기저귀를 가는 남편, 밤중 수유를 거드는 남편. 아기띠를 멘 남편, 아기와 놀아주는 남편, 아기를 재우는 남편.


남편들이 너무 많았다. 아니, 존재하는 남편들이 너무 많았다.


거울을 보았다. 웬 할머니가 서 있었다.

눈에는 핏줄이 터져 빨갛게 실핏줄이 보였다. 얼굴은 붓기로 퉁퉁 부어 있었다. 머리는 며칠째 감지 못해 기름기로 떡졌다. 부스스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귀신 같았다.


삼십 대 중반의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출산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시 폰을 들었다. SNS 속 엄마들을 보았다.

그들은 예뻤다. 아기를 낳은 뒤에도 어찌나 그렇게 예쁘고 싱그럽던지. 화장한 얼굴, 단정한 옷차림, 미소 짓는 여유. 마치 아기를 낳지 않은 것처럼. 아니, 아기를 낳아서 더 빛나는 것처럼.


나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산후풍으로, 외로움으로, 배신감으로.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 전체가 시들어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질투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은 분명히 질투였다.

부러웠다. 그들의 남편이. 그들의 몸이. 그들의 여유가. 그들의 미소가. 그들이 찍을 수 있었던 만삭 사진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왜 나는 저렇게 못 할까. 왜 우리 남편은 저렇게 안 할까.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왜 나만 혼자인 것 같을까.

스크롤을 내리면서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내 삶이 초라해 보였다. 내 선택이 잘못된 것 같았다. 내가 부족한 사람 같았다.


비교는 독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중독처럼, 아픈 줄 알면서도 계속 들여다봤다.

친정 부모님이 아기를 봐주셔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기를 안고, 이 망가진 몸으로, 혼자서.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데도 죄책감이 들었다. 엄마가 아기를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친정에 의지하고 있다는. SNS 속 엄마들은 혼자서도 잘하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한지.


화면 속 그들은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비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현실을 실패로 규정하고 있었다.


나만큼 괴롭고 외로운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은 저 화면 속에 있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만 아픈 것 같았다. 나만 힘든 것 같았다. 나만 외로운 것 같았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SNS는 편집된 삶이라는 것, 모두가 가장 좋은 순간만 올린다는 것, 화면 뒤의 진짜 모습은 다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가슴은 달랐다. 가슴은 그 이미지들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진실 앞에서 내 삶은 너무 초라했다.


아기가 깨어 울었다. 엄마가 달려갔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폰을 쥐고 있었다. 일어날 힘이 없었다. 산후풍이 온몸을 꽁꽁 얼려놓은 것 같았다.


창밖을 보았다. 봄이었다. 꽃들이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내 안에는 겨울이 머물고 있었다. 차갑고 어둡고 긴 겨울.


폰을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다음 게시물로 넘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행복한 가족. 또 다른 완벽한 순간. 또 다른 나와는 다른 삶.


지금도 나는 질투를 느낀다.

시간이 지났다. 아기가 자랐다. 내 몸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상처의 흉터처럼, 날씨가 흐린 날이면 욱신거리는 것처럼, 질투는 내 안에 남아 있다.


SNS를 열면 여전히 행복한 엄마들이 있다. 봄날의 꽃처럼 화사하고, 아침 이슬처럼 싱그럽고, 햇살처럼 따뜻한 그들의 모습. 나는 여전히 그것을 보며 움츠러든다. 시든 꽃이 만개한 꽃을 보듯.


질투가 나쁜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어쩌면 질투는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직 무언가를 원하고, 아직 무언가를 갈망하고, 아직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증거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다.

화면 너머의 삶은 내 삶이 아니라는 것. 그들의 행복이 내 불행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 정원의 모든 꽃이 같은 시기에 피지 않듯, 모든 엄마가 같은 방식으로 빛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비교 속에서는 어떤 꽃도 제대로 필 수 없다. 옆의 장미를 부러워하는 백합은 자신의 향기를 잃는다. 옆의 백합을 부러워하는 장미는 자신의 빛깔을 잊는다.


나는 내 꽃을 피워야 한다. 비록 시들었다 해도, 비록 늦더라도, 비록 다른 꽃만큼 화려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내 정원이고, 이것은 내 계절이고, 이것은 내가 피워야 할 꽃이니까.


오늘도 나는 폰을 든다. 남편의 연락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어느새 SNS를 켜고 있다.

또 다른 행복한 게시물이 올라와 있다. 스크롤을 내릴까, 말까. 손가락이 망설인다.


아기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거실에서 엄마와 놀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일어난다. 산후풍으로 뻣뻣한 몸을 조금씩 펴가며.


폰을 내려놓고 문을 연다. 아기에게로 간다. 화면 속이 아닌, 진짜 내 삶 속으로.

그래도 폰은 주머니에 있다. 언제든 꺼낼 수 있는 거리에.


질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뿐이다. 화면을 끄고, 현실을 보는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천천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비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하지만 여전히, 가끔은, 나도 모르게, 폰을 켜고 있다.

그리고 질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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