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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 나무 Aug 07. 2023

새롭게 시작하는 방법

잎을 모두 떨구어도 뿌리는 더 깊이 땅을 향해 파고든다는 것을 떠올리기

나무 패널에 아크릴 물감과 수채물감

직전에 완성했던 국화꽃 한 송이 패널에 이어 비슷한 느낌으로 하나를 더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가을 연작 시리즈 2탄. 


이번에도 선생님의 새 그림을 샘플로 삼았는데, 부러진 나뭇가지에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낙엽이 달려 있는 장면이었다. 그림을 계속 들여다보는데 여러 감정이 묘하게 뒤섞였다. 빈 나뭇가지만 있었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쓸쓸함만으로는 다 설명이 안 됐다. 비록 시든 잎이지만 아직 떨구지 않고 있으니 희미한 기대감이 느껴지는 건 과장된 것이었을까? 마지막 잎새라기엔 이파리 하나가 더 남아 있어서였는지 마냥 외로워 보이지만도 않았다. 마침 국화 그림 패널과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잘 어울렸다. 내 것으로 갖고 싶은 욕심과 직전 완성도에 고무되어 이번에도 도전해 볼 욕심이 생겼다. 


바탕을 채색하기까지는 분명 의욕이 넘쳤다. 붓질을 할 때도 막힘이 없었고. 본 주제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다 완성된 결과물을 예상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막상 진짜 주인공을 그리려 하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얼핏 보았을 때 예상한 것과 실제는 너무나 달랐다. 이전 작업과 비슷해서 어렵지 않을 거라 덤벼 들었지만 선생님의 원작 느낌을 좀처럼 살릴 수가 없었다. 살리기는커녕 비슷하게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원작 속에는 쓸쓸함과 아쉬움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은 살아 있는 생명력과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조금이라도 만들고 싶어서 선생님 작품을 이리보고 저리보고, 아무리 보고 따라 그려도 도저히 살릴 수 없었다. 분명히 부러진 나뭇가지인데 약이 올라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느낌이 드는가 하면, 원작에서 느껴지는 시든 듯 투명하게 보이는 이파리는 손을 대면 댈수록 어둡고 칙칙해졌다. 흉내 내려 하면 할수록 오리지널과 멀어지는 나의 그림을 보면서 붓가는 대로 흔적이 남는, 속일 수 없는 화판을 통해 또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배운다.


전문적인 실력 차이는 당연하지만 자신의 생각으로 진짜를 만든 사람과 진짜‘처럼’ 보이려 한 사람의 차이는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진짜에는 그것을 처음 만든 사람의 영혼이 녹아 있지만, 아무리 훌륭한 모사를 한다고 해도 가짜에는 진짜를 만든 사람의 영혼은 들어있지 않으니까. 겉모습은 따라서 흉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속에 담긴 창의성은 흉내 낼 수 없으니까. 그것이 오리지널만이 갖는 힘이니까. 




내가 상담을 학문으로 공부하게 된 것은 졸업을 앞둔 직전, 준비했던 시험에서 보기 좋게 탈락하면서부터였다. 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에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부터 본격적으로 임용고사를 준비했다. 방학이면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첫 지하철을 타고 노량진으로 종로로 학원을 다녔다. 학원에서 오전을 보내고 다시 학교 도서실로 가서 밤 10시까지 공부하다 집에 오면 11시가 넘었다. 새벽 1시까지 자습을 하고 다시 첫 차를 타기 위해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부전공 과목으로 임용고사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전공생들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학습량은 아무리 공부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 들었다. 열등감은 둘째치고 기본 이수학점 차이에서 오는 학습량을 조금이라도 메우고 싶어 몇 과목은 학기 중에 청강도 했었다. 학점관리를 위해 정식 수강은 엄두를 못 내고 담당교수님을 찾아가서 과제물과 시험을 모두 보는 조건으로 겨우 청강을 허락받았다. 수강신청도 하지 않은 과목이지만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시험에 과제까지 꽤 성실히 이수했었다. 


하지만 시험 준비, 특히 국가고시 같은 시험은 결코 하루이틀, 한두 달 집중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두 해는 기본이고 기본기부터 전략 및 전술까지 체계적으로 준비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시험을 앞둔 최종 1년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페이스를 조절해야 하는 레이스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특히 국가고시에 도전하겠다는 것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는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다시 고3 수험생이 된 것처럼 4당 5락의 자세로 생활하고, 휴게실에서 혼자 차가운 도시락을 먹으면서 요약노트를 외우는 것이 합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치열하게 시험을 준비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은 내가 왜 교사가 되고 싶은지, 정말 되고 싶은지, 얼마나 되고 싶은지 그런 기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는 것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상담을 학문으로 공부하기로 한 결정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주위에 가까운 친척 누구도 나보다 먼저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이 없었다. 상담이라는 분야에 대한 이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이유였기에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했고,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결정이었기에 그에 따른 책임도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이후의 과정은 과연 나의 선택이, 나의 결정이 옳은 것이었을까를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한 것에 가깝다. 공부 초반에 제일 먼저 스스로에게 느꼈던 부끄러움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가 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왜 싫은지에 대한 질문을 할 때마다 나에게 할 수 있는 답이 너무 궁색하고 초라했다. ‘그냥’이라는 답은 쉬운 것이 아니라 무책임한 것이었다.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서 믿음이 없었는지, 내 인생이라고 하면서 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내 현재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것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거창한 목적도 없이 그저 앞서 간 사람들이 켜 놓은 불빛을 따라갔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길을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끝까지 다른 사람이 밝혀 놓은 불빛을 무심코 따라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부터 인가 캄캄하고 어두웠지만 스스로 불을 밝히면서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용기가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감사한 용기가 생긴 것도 앞서 간 사람을 따라 걷는 동안 보고 듣고 배워왔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테지만.


흔히 무언가 썩 원하지 않은 결과가 예상될 때,‘리셋(reset)’하고 싶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이때 사용하는 리셋의 의미는 그간의 경험이 결과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니 완전히 깨끗하게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그런 의미의 리셋을 원하지는 않는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걸어온 길이었음에도 나에게 지난 시간들은 경험이 되고 자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실패는 또 다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교재이자, 위험 구역을 피해 갈 수 있는 나만의 지도가 되었다.   




새로운 시작은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들을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지나온 시간들을 정리하고 정제하는 시간을 통해 무심코 지나친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고 간직할 것과 버리고 놓아주어야 할 것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가 겨울을 채비하며 잎을 모두 떨구어도 뿌리는 더 깊이 땅속을 향하고 지난 시간을 나이테로 기록하는 것처럼, 실패로 보이는 도전의 결과도 다음의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 연습의 경험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풍성하게 보이던 잎을 잃고 꽃도 잎도 없는 가지만으로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나무의 용기와 당당함을 닮고 싶다. 타인의 시선에,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의 사이클에 충실히 살아가며 성장하는 나무의 지혜를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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