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이틀 동안의 제주도 식물탐사의 길을 나섰다. 공항버스도, 김포공항도, 제주공항도 주말을 맞이하여 행락객으로 만원이다. 제주공항을 나서자 미니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생물다양성교육센터 주관으로 제29차 <한국의 재발견 식물탐사대>의 제주도 식물 탐사가 시작되었다. 한겨례신문의 조홍섭 기자님이 대장이며 이번 탐사에는 16명이 참가하였다. 오전에는 한라생태숲을 돌고, 점심 이후 백약이오름을 탐사했다.
이 날의 마지막 일정은 선흘곶 동백동산이다. 선흘리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북방향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이다. 선흘의 '흘'은 깊은 숲을 의미하며 제주의 숲 곶자왈을 가지고 있다. 동백동산은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불리우는 지명이다. 곶자왈의 지형과 숲 구조때문에 빗물이 흐르기 보다는 지층으로 투과되어 대수층(aquifer)에 축적된다. 그래서 동백동산은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습지도 있다. 무엇보다도 동백동산의 곶자왈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난대상록수림이다. 나는 이 곳에서 난대상록수림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을 찾고 싶었다.
우리나라의 산림은 온대낙엽활엽수림이 주축이다. 봄과 여름에는 산림이 우거지고, 늦여름에는 단풍이 시작된다. 가을에는 단풍이 절정이고 낙엽이 진다. 겨울에는 대부분의 나무에서 나뭇잎이 없는 상태로 월동을 한다. 그래서 4월 초인 지금 온대낙엽활엽수림에 들어서면 숲 안이 밝다. 아직 개엽이 시작하기 전이거나, 이제 막 새잎이 나오기 때문이다.
동백동산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느낀 점은 어둡다는 것이다. 숲에 들어선 시간은 오후 4:15분 정도로 아직 해가 밝은 대낮이다. 그렇지만 어떤 장소는 너무 어두워서 내 SLR 카메라로 찍을 때 셔터 속도가 1/15초 이하로 떨어졌다. 겨울 동안에도 숲의 나무들이 잎을 모두 떨어뜨리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곶자왈은 용암이 흘러가다가 굳어져 생긴 지형이다. 그래서 동백동산 곳곳에 용암 활동을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용암언덕인데, 이것은 용암이 흘러가다가 장애물에 부닥쳐 부풀어 오른 구조이다. 이런 곳은 이끼와 지의류가 잔뜩 낀 바위들이 많다. 동백동산은 돌 위에 형성된 숲이다. 어디를 가도 돌 투성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곶자왈이 근대 이전까지 비교적 원형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 탐사대의 강사님인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 소장님은 옛날에는 이 땅을 공짜로 주어도 안 가져간다고 했다. 돌 투성이의 땅에서 경작이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 소장님의 집은 이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숲길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그랗고 납작한 원판이 옆으로 서있었다. 원판은 뿌리로 얽히고설켜 있었고, 원판 윗부분에 구실잣밤나무가 솟아 있었다. 구실잣밤나무는 원래 뿌리가 옆으로 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나무는 표토가 얇은 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뿌리는 땅속으로 얼마 들어가지 못하고 돌에 부딪혀 옆으로 뻗어나갔다. 그러다가 이유는 모르지만 이 나무는 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무는 다시 위로 성장하여 꿋꿋이 살고 있다.
얇은 표토에 적응한 대표적인 사례는 판근(buttress root)이다. 나무의 곁뿌리가 평판(平板) 모양으로 되어 땅 위에 노출된 것으로 온대 지역에서는 보기 어렵다. 이 판근은 나무가 넘어지는 것을 방지한다. 주로 표토가 얇은 아열대나 열대 나무 중에서 발달하는데 이 곳에서도 판근을 가진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백동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사진 찍기 정신없었던 나와 몇몇은 무리에서 뒤쳐지기 시작했다. 현 소장님은 우리를 부르면서 종가시나무와 참가시나무가 바로 옆에 있어 구별하기 좋은 장소라고 알려주셨다. 우리는 이 두 나무의 차이점을 알려고 노력하였다. 이 두 나무는 참나무의 일종으로 구실잣밤나무와 더불의 이 숲에서 흔하다. 다시 말해 이 나무들은 키가 크게 자라고, 그 숫자도 많다. 온대 활엽수림의 참나무 수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나도 열심히 두 나무의 나뭇잎을 비교하다가 일부 나뭇잎이 색이 바랜 것을 발견하였다. 짙은 갈색의 나뭇잎은 주위의 녹색 광택이 나는 나뭇잎과 뚜렷이 비교되었다. 갈색 잎은 엽록소 생산이 감소하기 시작하여 단풍이 들고 있는 나뭇잎이다. 난대상록수림에서도 낙엽이 진다. 다만 한 나무에서 일부의 나뭇잎만 낙엽이 진다. 그래서 난대성록수림의 나무는 한쪽에서는 새순이 돋는데, 다른 쪽에서는 낙엽이 진다.
이런 현상은 온대활엽수림에서 찾기 어렵다. 온대활엽수림의 나무는 동시에 새순이 돋고, 동시에 낙엽이 진다. 한 나무에서 새순과 낙엽이 같이 있는 경우가 없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에서 새순과 단풍이 든 나뭇잎이 같이 있는 모습이 온대활엽수림에 비해 이 난대상록수림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동백동산의 숲길을 걷는 내내 하늘을 쳐다보았다. 숲의 가장 높은 층을 캐노피(canopy)라 한다. 어두운 숲 속을 밝히는 햇빛이 캐노피의 틈으로 통과하였다. 자세히 보니 한 나무는 옆의 나무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곶자왈의 캐노피는 잘 맞춘 퍼즐 조각 같았다. 이것은 나무와 나무가 햇빛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추운 겨울이 없어 항상 녹색을 유지하는 난대상록수림이지만, 이곳의 나무들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방문일: 2016년 4월 9일
장소: 제주도 동백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