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중인 어미와 새끼 귀신고래
연구년으로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에 머무는 동안 반드시 보아야 할 동물의 최우선 순위가 귀신고래이었다. 귀신고래는 무게가 무려 30톤이 넘어가며, 고래 중에서 가장 예측 가능한 이주를 하기로 유명하다. 한때는 우리나라 동해에도 귀신고래가 아주 흔했다. 우리나라에 출현하는 귀신고래를 서태평양 귀신고래 또는 '한국계 귀신고래'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개체수가 130마리 정도 이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동태평양 귀신고래는 그 수가 무려 2만 마리에 가깝다.
동태평양 귀신고래는 여름에는 알래스카 해안에서 섭식을 하고, 겨울에는 바하캘리포니아에서 출산과 육아를 한다. 그래서 봄에 귀신고래는 북으로 이주하고, 가을에 남으로 이주한다. 운이 좋으면 봄 이주 시 어미와 새끼 귀신고래가 같이 북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운 좋은 날이길 바라면서 배에 올랐다. 승선하자마자 해설가에게 오늘의 운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매번 나갈 때마다 상황이 다르다고 살짝 물러서면서, 이번 시즌은 지금까지 어마어마하다고 귀띔해 줬다. 해설가의 귀띔은 포구를 벗어나자마자 적중했다. 바로 눈앞에서 어미와 새끼 귀신고래를 발견했다. 어미가 크게 숨을 쉬며 물보라가 공중으로 솟구치면, 잠시 후 새끼도 살짝 숨을 내쉬웠다. 귀신고래는 숨을 내쉬고, 살짝 잠수하다가 다시 떠오른다. 이런 순서를 몇 번 반복하다가, 꼬리를 멋지게 보여주고 깊이 잠수한다. 귀신고래가 숨을 쉬고 잠수할 때마다 수면에는 뚜렷하게 발자국(footprint 또는 floodprint)이 남는다. 사람들은 이 발자국을 보고 다음에 고래가 어디로 떠오를지 예측하기 바쁘다.
귀신고래의 장거리 이주는 철새의 이주와 내용이 조금 다르다. 철새는 고위도에서 섭식과 번식을 하고, 저위도에서 월동을 한다. 그러나 귀신고래는 대부분의 번식행동이 저위도에서 이뤄진다. 새끼 귀신고래는 엄청 크기는 하지만 범고래와 같은 포식자에게 취약하다. 그래서 어미는 이런 포식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석호와 같이 얕은 바다에서 출산과 육아를 한다. 겨울철에 바하캘리포니아의 따뜻한 수온도 새끼가 무사히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바하캘리포니아에서 무사히 겨울을 나고 새끼가 몸집이 커지면 어미와 새끼는 이주를 시작한다. 이때에도 어미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쓴다. 포식자들은 수심이 깊은 곳을 선호하기 때문에 어미는 주로 해안 가까이서 유영한다. 또 가능하면 새끼를 해안 쪽으로 두고 유영을 한다. 만약 포식자가 새끼를 공격하면 새끼는 계속해서 좌우로 돈다. 이것을 '배럴횡전'이라 하는데 포식자가 어미와 새끼를 떼어놓는 것을 방지한다.
귀신고래는 이주할 때 해안을,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껴안으면서 간다. 그래서 이주할 때 동태평양 귀신고래의 항해법은 남하할 때는 해안선을 왼편에 두면 되고, 북상할 때에는 해안선을 오른편에 두면 된다. 이것을 '수로안내'(piloting)이라 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국계 귀신고래가 베링해를 건너 바하캘리포니아까지 남하하였다가 다시 북상하여 사할린까지 이동하였다. 이 연구결과는 서태평양과 동태평양의 귀신고래가 서로 상대방의 이주경로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귀신고래 이주경로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산산 조각내 놀랍기는 하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는 다른 종에서도 발견된다. 제왕나비는 록키산맥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에 있는 무리가 월동장소 및 다른 형질에서 차이가 있어서 서로 유전적으로 다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유전학 연구결과에 의하면 양쪽 무리는 서로 유전적으로 교류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내 앞에서 유영하고 있는 저 귀신고래 어미는 작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미 귀신고래가 새끼와 같이 알래스카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우리나라에도 꼭 오라고 속삭였다.
2015년 4월 2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