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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Apr 10. 2021

다양성을 발견하는 교육

영상제작 수업을 하다

진짜 오랜만에 청소년들과 영상제작 수업을 했다. 일동마을 청소년 동아리 팀에서 하는 줍깅 과정을 아이들이 직접 영상으로 남길 수 있는 수업을 하게 된 거다. 사실 연락 오고 나서 3주 전부터 걱정이 됐는지, 처음 수업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다. 아르떼 홈페이지에 가서 관련 교육안을 계속 찾아보고, 유튜브를 통해 최신 트랜드도 계속 공부했다. 내가 영상교육 강사를 본격적으로 했던 게 어느덧 5년이 넘은 상황이어서 유튜브 환경에서 어떻게 교육을 해야하는지 공부가 필요했다.


PPT 교육안도 처음 만들어 놓고 매일 조금씩 고쳤던 것 같다. 청소년 아이들에게 교육을 준비할 때는 어른들한테 강의할 때와는 다른 에너지가 쓰인다. 계속 상황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학생들은 주입식으로 강의를 듣고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열을 배우면 하나라도 뭔가 직접 몸을 움직여 실행했을 때 배우는 게 많다. 그래서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도 강사가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 아이들이 살짝 살짝이라도 계속 움직여서 머리를 굴리고 뭔가를 해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몇 명이 오고, 조를 어떻게 나눌지, 그 조원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방법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런 소소한 프로그램들을 배치해 놓고, 이게 실제로 유효하게 잘 진행되고, 아이들이 실제로 좋아할지 시뮬레이션 해보는 과정도 필요하다. 특히 첫 수업의 경우 아이들 성향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조금은 더 불안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첫 수업을 끝내고 나면 마음의 안정이 온다. 아이들 얼굴도 익히고, 이름도 알고 나면 그 장소와 사람이 편안해지게 되어 그런 것 같다.


첫 수업이 있던 토요일 오전, 마침 아침부터 추운 봄비가 후드득 내렸다. 늦잠 자고 싶은 주말아침에 아이들이 진짜 오기 싫은 마음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소심해졌다. 하지만, 아이들이 모두 약속시간을 잘 지켜서 모여주었고, 수업도 귀 기울여서 들어주었다. 촬영용어 등이 나와 지루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마스크 속에서 내 얘기가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딴짓도 안하고 꽤 집중해주었다.


그래도 역시 청소년들이 활기가 넘칠때는 조별로 몸을 움직여서 활동할 때다. 귀로 듣기만 해서는 뭔가 남는 것들이 없다. 직접 내가 해보고 느낀 것들만이 자기 것이 되는 것만 같다. 수업 준비하는 내가 제일 많이 배운 것과 같은 이치다. 아이들이 스마트폰과 삼각대로 직접 배운 것들을 활용해 친구들 모습을 직접 촬영 해보며, 서로 의견도 조율하면서 말을 건다. 처음에 쭈뻣쭈뻣하던 친구들도 어느새 한 가지 목표로 힘을 합쳐서 집중할 일이 생기니, 활기찬 에너지가 차오른다. 소소하게 웃을 일들이 생긴다.


가끔 청소년들을 볼 때, 굉장히 창의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아니, 여기서 이런 걸 생각한단 말이야!' 그런 것들을 발견할 때 참 기분이 좋다. 악동뮤지션만 천재가 아니라, 10대 아이들은 모두 내면에 자기만의 창의성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 <엑스맨>에 나오는 다양한 능력을 지닌 특별한 사람들처럼, 어떤 성향을 ‘참 별나다’고 보거나 ‘특별하다’고 보는 건 진짜 한 끗 차이인 것 같다.


청소년들은 제대로 구체적으로 칭찬받는 걸 참 좋아한다. 그건 사람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청소년들에게 그렇게 칭찬해줄 때면 아이들이 오랜만에 물을 머금게 된 식물들처럼 생생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한 아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잘 관찰해줄 수 있는 어른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된다. 정직하게 구체적인 방식으로 칭찬받은 아이들은 조금씩 내면의 단단한 벽돌로 자존감의 집을 지어나간다.


교육은 아이들이 그 내면의 단단함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주 사소한 것들을 해보거나 즐기면서 내가 의외로 잘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의 단점들도 쿨하게 인정하며 나란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그 성장통의 과정에서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길을 찾아보는 실패의 경험을 마음껏 제공할 수 있는 곳이 학교가 돼야 하지 않을까.


오늘 일동에서 순수하게 작은 프로젝트에 함께 몰입하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쳤다. 내가 준비했던 참 소소한 실습수업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경쟁 없이 서열 없이 세상의 다양한 배움을 알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교과서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아이들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험을 직접 해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왜 세상은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학교는 딱 가지 기준으로만 아이들을 판단할까. 이제 세상 대부분의 지식은 유튜브만 검색해도 금방 공부할 수 있는데, 지식을 가르치는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그 지식을 더 많이 외운 순서대로 아이들의 서열이 매겨질까. 그 한 가지 기준의 서열 덕분에 실제로 너무 많은 아이들이 공교육 바깥에 존재한다. (학교에 있지만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학교 교육이 아니라 또 다른 거리의 교육을 받고 사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나.)


“브레인 인데!”, “사진 구도 참 좋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대”, “이 컷은 제대로 잘 찍었다”… 청소년들과 몸을 움직이며 수업을 하면 소소하게 할 수 있는 칭찬들이 참 많다. 처음에 엉덩이가 무겁던 친구들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해내고, 눈빛이 반짝인다. 더 넓은 공터가, 더 넓은 실험실이, 더 넓은 창고가, 더 넓고 다양한 시각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은 열정이 없었던 게 아니라, 작은 성공과 실패들을 자유롭게 하면서 응원받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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