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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Apr 10. 2021

내가 '나'로 환대받을 수 있는 느슨한 공간

청소년열정공간99도씨를 떠올리며

예전부터 마을에서 공동체 활동하며 가장 좋았던 점을 뽑으라면 동네 청소년들과 골목에서 인사하며 지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마을카페 이모로 교복 입은 학생들과 반갑게 인사 나누고, 마을 축제에서 청소년들과 봉사를 함께 하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청소년 공간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을카페가 있었지만, 그곳을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공간으로 마음 편하게 쓰지는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음료 판매를 하는 공간이다 보니, 마을의 공유공간이라도 청소년들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편하게 있기는 어려웠던 게 당연하다.


사동 감골마을을 중심으로 마을계획 이야기가 나오면서, 청소년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작게나마 내보게 됐다. 아이들은 밴드 연습도 하고, 운동도 하고, 춤도 출 수 있는 자유로운 청소년 문화공간을 꿈꿨다. 타지역 청소년 공간도 방문해보고, 디자인대학을 하며 공간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도 펼쳐봤다. 하여튼 마을 청소년동아리 1기 친구들은 김부일 교사와 함께 열심히 공간을 향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축제에서 음료수나 옷도 팔아서 기금을 모으기도 하고, 지원 방법도 수소문했다. 그리고 드디어 2017년, 여러 우여곡절을 끝에 예전 마을카페 자리에 청소년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마을 청소년들의 오랜 꿈과 청소년들을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동아리 교사로 오랫동안 아이들을 만나왔던 부일 샘의 결심이 어렵게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난 그때 부일 샘의 권유로, 99도씨 교사로 합류하게 됐다. 새로 만들어질 청소년 공간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사실 처음에 부담이 전혀 안 됐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99도씨를 부일샘과 함께 돌봐야 할 사람이 필요했고, 근본적으로 내 마음 깊은 곳에 4.16이후 청소년들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것이 있어서, 뭐든 하는 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목요일 샘이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덜 오는 시간이었다. 처음에 99씨를 지켰을 때만 해도 살짝 아이들이 오는 걸 겁내 했던 거 같다. 부일샘처럼 평소에 청소년들을 자주 만나던 상황이 아니어서, 아이들에게 내가 혹시 실수하게 될까 봐 겁도 났고, 아이들과 편하게 있는 것도 처음에는 어색했던 거 같다. 지금도 능숙한 99샘이 됐다고 말할 순 없지만, 하여튼 그때는 더 엉성하고 부족한 99샘이었던 것 같다. 유일하게 품고 있었던 다짐은, 99℃에서만큼은 아이들을 선입견 없이, 편견 없이 대하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99도씨에서 4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사이에 나는 출근하는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었고, 다시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99도씨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 사이에 99도씨 공간에도 다양한 아이들이 오고 갔다. 날씨가 365일 다르듯 99도씨에는 다채로운 색깔의 청소년들이 찾아왔고,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많이 힘들었던 아이들도 있었고,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고 안정을 찾은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하고 있었고, 그 실험은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었다. 교사들은 그 속에서 같이 태풍을 겪어내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고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시간들이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을.


날씨 같은 아이들은 99도씨 공간에 한 달 내내 올 때도 있었고, 1년 동안 안 나타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길에서 우연히 99샘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 줬다. 공간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친구들도 동네에서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잘 지냈냐는 말 한마디를 나누며, 99도씨에 오랜만에 오면 아무렇지 않게 음료수를 건넸다.


99도씨 공간에 불이 켜져 있으면, 1년 만에 나타난 친구들도, 몇 달 만에 오는 친구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음료수를 마시고 갔다. 오랜만에 들려서 몇 시간 동안 자기 이야기를 하고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군대나 대학 간 아이들도 들려서 회포를 풀고 가기도 했다.


“잘 지냈어”, “밥 먹었어?”

99도씨는 그 평범한 말 한마디를 하며 마음의 벽을 허물고 타인을 만나는 곳이다.

엄청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엄청난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작은 등불처럼 그곳에 서서 99도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들을 환대한다.


청소년 공간에 있으면서 사춘기 아이들의 답답함과 열등감, 불같은 반항과 뜨거움이 아주 조금씩 자기를 찾아가는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사춘기가 없는 아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결국은 둥지를 떠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기가 오고 만다. 그 시기에 가족 말고 나를 조금은 적당한 거리에 서서 환대해줄 수 있는 작은 공동체가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아이들은 안 듣는 것처럼 보여도 듣고, 안 보는 것처럼 보여도 다 보고 있다. 그리고 귀신같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의 온도를 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안전한 공간에서 자신을 기다릴 수 있는 시간과 커다란 귀만 있으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교사는 농부처럼 긴 시간이 만드는 기적을 믿는 사람들이다.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변함없이 청소하고 밥을 하고,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아이들은 건강한 마음의 토대 위에서 부지불식간에 싹을 틔우고, 잎을 만들고 열매를 맺는다. 뭔가를 시작해볼 수 있는 동력을 얻고, 타인과 대화하며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에너지를 끌어낸다.


서열과 학벌이 지배하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이 작고 느슨한 공동체는 뭘까. 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것, 다른 어른들을 만나는 것. 그 다름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저 사람도 어쩌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을 기억해 본다.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에서는 내가 뭘 하든, 어디에 살든, 어떤 모습이건, 그냥 나로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99도씨를 생각하며 내가 꿈꾸는 이미지는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다. 청소년들이 힘들고 지칠 때, 그 나무 아래에서 때론 비를 피하고 더위를 피하면서 잠시라도 안식을 얻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먼 훗날 그 커다란 나무에서의 추억을 떠올렸을 때 초가을 바람처럼 참 시원하고 기분 좋은 것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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