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것이 좋아'를 보고 마음에 남았던 그녀의 상념
예전에 빌리 와일더의 흑백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를 극장에서 보고는, 마릴린 먼로의 서글픈 눈빛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시종일관 웃기는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 속에서도 먼로는 예상할 수 있는 코미디 수위의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그 안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지고 살아온 구체적인 여인을 보여준다.
스크린에 클로즈업으로 먼로의 얼굴이 비출 때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속에 쌓여있는 절망과 체념의 정서가 베어 나온다.
아마 그건 일정부분 여주인공 역할에 실제 마릴린 먼로의 비극적인 삶이 오버랩되면서, 더 그런 정서를 자극한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먼로의 자학적인 대사가 들릴때면 한없이 그녀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
하지만, 한 배우가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과 배우의 얼굴과 연기 자체에서 그런 신비스러운 부분을 관객들이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런 면에서 나도 이동진 평론가의 말대로 마릴린 먼로가 꽤 훌륭한 연기자라는 것에 적극 동의한다.
스크린에 먼로의 얼굴이 잡히는 순간, 예쁘고 아름답다는 것과는 또 별개로 영화적인 얼굴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분명 그 역할은 단순하게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야망을 가진 순진무구한 여주인공에 불과한데, 서른이 넘은 먼로의 얼굴에 덧입혀 지는 순간, 삶의 모든 모순적인 감정들을 그러모은 비극적인 얼굴로 다가온다.
그녀는 삶이 예상보다 더 비극적이라는 걸 알고 있고, 어떤 식이 되었든 사랑이란 결국 덧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일정한 비관을 가지고 끝없이 늘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씁쓸히 지켜보는 것만 같다.
먼로의 연기는 홀딱 빠져있는 상태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체념한 상태의 자기 파괴적인 열정이 공존한다.
그래서 그녀가 우크렐라를 치면서 춤을 추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밝은 순간에도, 그 맑은 절망에 그녀가 저절로 바스러져 버릴까봐 슬며시 걱정이 된다.
영화의 내용과 아무 상관없이 마릴린 먼로의 얼굴 자체가 왜 그렇게 많은 상념에 젖게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내린 결론은, 그 얼굴은 어쩌면 삶의 수많은 비밀들에 우리가 마주치기 두려워 피해왔던, 혹은 너무 정직하게 드러나서 똑바로 지켜보기 힘들었던 표정과 눈빛을 품고있기 때문인것만 같다.
먼로의 순박함은 그 자신이 버텨 온 삶의 배신들을 어떤 연기적인 가면 없이 그대로 얼굴자체에 드러낸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하지도, 연민을 구하지도 않고, 마음 한구석 남겨진 폐허의 풍경을 고스란히 지나치는 몇 초의 순간은, 우리도 알고 있지만 차마 보여줄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홀로 있을 때 한번쯤 지나쳤던 어떤 표정이 먼로의 공허한 눈빛과 화사한 빰 사이로 투명한 그늘을 만드는 순간, 내가 지나쳤던 어떤 후회들에, 삶에 문득문득 지나치는 쓸쓸한 예감들에 이상하게 아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