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더> 이야기
<마더>는 첫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딴청 피우지 않고 달려가는 영화다. 흐린 하늘, 노란빛 보리밭 한가운데 한 나이든 여인이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서서 이상한 춤을 춘다. 그녀는 무섭고, 기괴하며,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 불안하다. 엄마(김혜자)를 허허벌판에서 정면으로 잡은 컷에서 관객들은 도무지 그녀의 정체를 종잡을 수 없다. 그녀는 적인지 동지인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김혜자라는 배우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를 <마더>의 첫 장면은 철저히 배반하며 시작한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백지상태의 광기어린 혜자의 표정 자체가 이 영화의 미스터리다.
봉준호 감독은 왜 온전히 엄마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했을까? 그의 전작들을 보면 겉으로는 평화롭고 한가해 보이는 공간속에 무시무시한 실체가 숨어있는 걸 볼 수 있다. 80년대 시골도시에는 연쇄살인범이 살고 있고, 한강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공간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끔찍한 사건이 끼어들자, 그제야 그냥 지나치고 회피했던 일상의 폭력과 부조리가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여기서 <마더>도 그의 전작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어떤 일관성이 드러난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관계로 인식되는 것이 엄마라는 존재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성이 갖고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을 많은 이들이 가장 숭고하게 여긴다. 그러나 엄마라는 존재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꼭 아름다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도 분명 사람이고, 엄마와 자식의 관계 또한 여느 관계처럼 보이지 않는 어두움과 상처들을 함께 나눠 갖고 있다. 특히 <마더>에서 남들보다 정신연령이 떨어지는 도준(원빈)과 함께 사는 엄마는 아들에게 더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 거기다 어릴 적 도준에게 농약을 탄 박카스병을 먹였다는 죄의식까지 겹쳐져 혜자는 더더욱 아들과 기형적으로 얽혀 있다. 자기 자식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시선과 집착은 그 어떤 광기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과도한 애정의 이면에서 우리는 엄마의 히스테리를 발견한다.
감독은 가장 일상적이고 가까운 엄마라는 존재의 심연에 들어가서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의 어두움을 드러낸다. 엄마의 광기어린 모습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암울한 이 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여고생 아정의 살인범으로 몰린 도준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그 과정에서 겉으로 평화로운 시골 소도시 안에 어둡고 추악한 면들을 하나씩 보게 된다. 경찰은 정신도 온전치 않은 도준을 데려다가 협박으로 사건을 서둘러 끝내려 하고, 돈 안 되는 사건에 애당초 관심도 없던 변호사는 룸살롱에 앉아 대충 합의를 보고 끝낼 생각만 한다. 결국 범인을 직접 잡으려고 아정의 뒷조사를 시작하던 엄마는 마을의 많은 남자들에게 소녀가 성적으로 유린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늪 속을 헤쳐 나가며 어떻게든 엄마는 아들의 무죄를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 아들은 아니야” 라며 눈에 불을 켜고 항변하던 엄마의 한 가닥 믿음도 남겨둘 수 없을 만큼 세상은 지독히도 어둡다.
엄마는 도준이 풀려나는 대신, 더 불쌍한 아이 종팔이가 감옥에 있는 것을 보고, “엄마 없어?” 라며 울먹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게 없다. 그렇게 봉준호가 그리는 우리 시대 영웅은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의 오물과 구정물을 받아내고, 손에 피까지 묻히면서 아들의 죄악들을 덮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엄마들은 어쩌면 이 사회가 낳은 또 다른 괴물인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그들이 그토록 추악하게 미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회 전체의 광기 어린 풍경을 통해서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 괴물들은 무서우면서도 한없는 연민을 자아낸다.
혜자는 발버둥 치며 잊고 싶은 기억 하나를 더 갖고 되고, 지금까지 그랬듯 홀로 그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폭발할 것 같은 이 사회의 더러움을 다 끌어안고 어둠의 심연을 보게 되었을 때, 생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걸 망각 속에 묻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혜자는 자신의 허벅지에 스스로 침을 놓고는 그 모든 것을 잊으려 한다. 버스 밖으로 나온 카메라는 석양이 비치는 창가로 미친 듯이 음악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아주머니들의 실루엣을 보여준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엄마도 일어나 그 무리에 동참해 정신없는 몸부림으로 버스 앞쪽으로 나아가고, 차창의 흔들림을 그대로 전달하며 카메라도 그녀를 따라간다.
보통 사람들이 꼴불견으로 여기는 고속버스 춤을 감독은 가장 아름다운 광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치 범접할 수 없는 공간에서의 성스러운 제의처럼 그 좁은 버스통로에서만은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 모든 고통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사회 밑바닥에서 더러운 것과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다 짊어지고 그래도 어떻게든 삶을 꾸려나가는 아주머니들의 몸부림이 주홍빛 석양의 빛을 받으며 서럽게 대기를 부유한다. 그 버스가 가고 있는 암울한 시대위로 노을빛을 비춰 줄 수 있는 감독의 시선에 이상하게 한쪽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