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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May 12. 2021

우린 그렇게 인생이란 모험을 살아낸다

몇 번을 봐도 울게되는 픽사의 <업>

 예전 대학생 때 우연히 <니모를 찾아서>를 노트북의 흐린 화질로 본 이후로 픽사의 광팬이 됐다. 그 이후 픽사 영화는 무조건 영화관에서 봤다. <라따뚜이>를 극장에서 봤을 때는 2살 된 둘째를 안고 정신없이 봤는데, 여지없이 비평가 이고가 라따뚜이 먹는 장면에서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월-E>에서 이브의 손을 잡고 싶어하던 월-E의 뭉툭한 손놀림에 내 가슴도 덩달아 쿵쿵 거렸다. 픽사의 성공은 치밀한 스토리텔링의 뼈대 아래 단 한 장면도 대충 넘어가지 않는 장인정신에서 비롯된다. 거기다 흔히 사회에서 소외받을 만한 왕따 캐릭터와 남들이 다 꺼려하는 소재들을 사랑스럽게 창조하는 마법은 픽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지 오래다.


픽사 애니메이션 <업>도 그런 기대를 전혀 배반하지 않는다. 인물은 더 사랑스러워졌으며, 풍경은 아름답고, 이야기는 유려하다. 그리고 아무리 시니컬한 어른들이라도 눈시울 적시지 않고는 못 베길 만한 두어 장면들이 숨어있다. 대사 없이 영상과 음악으로 칼과 엘리의 결혼부터 엘리의 죽음까지를 압축한 4분가량의 시퀀스는 숨 막히도록 아름답고도 슬프다. 픽사는 전혀 신파적이지 않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긍정주의에 닭살을 보내던 어른들까지 어느 순간 몰래 눈물을 훔치며 극장 문을 나서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 눈물이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은 정제된 행복감을 준다. 픽사가 만드는 착한 심성의 애니메이션에서 관객들은 무얼 본 걸까. 


어릴 적 남미 파라다이스 폭포에 가고 싶어했던 아내 엘리의 꿈을 이뤄주지 못한 칼은 그녀가 죽자 크게 상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와의 추억이 깃든 집을 통째로 풍선에 매달고 남미로 여행을 떠나는 계획을 실행해 옮긴다. 그런데 풍선을 단 집이 하늘 높이 비상한 순간,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린다. 노인 봉사 배지를 타려고 집 앞을 어슬렁거리던 꼬마 러셀이 발코니에 있다가 같이 올라온 것이다. 그렇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커플, 굳게 다문 입술의 고집 센 할아버지와 동글 통통 순진무구한 소년의 모험은 시작된다.  

애니메이션 <업> 스틸컷

풍선을 달고 하늘을 나는 집의 이미지는 여행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의 판타지 일 것이다.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을 하되,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한 일상을 보내는 것.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쉽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땅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힘에 날아오르려는 풍선의 저항은 집의 무게를 당해낼 수가 없다. 영화 초반 잠깐 중력의 장에서 자유롭던 집은 시간이 흐르면서 날아오르려는 힘과 끌어내리려는 힘 사이에서 위태하게 땅에서 조금 떠있을 뿐이다. 풍선을 매단 집을 힘겹게 끌고 가는 칼의 이미지는 우리 삶이 위치한 애매한 자리의 은유처럼 보인다. 삶이란 날아가고 싶은 욕망을 위로하며, 인생의 거추장스러운 무거운 짐들을 끌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여행 같은 것이다. 어쩌면 그 여행의 피로가 삶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업>은 그 피로함에 침잠하지 않고, 오렌지빛 필터를 끼고 일상을 바라본다. 


그 지친 여행의 끝에 칼은 드디어 파라다이스 폭포에 도착한다. 그런데 여행의 목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쓸쓸하다. 그제야 칼은 깨닫는다. 실은 자신이 진짜 모험을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삶 속에서 일어나는 정말 어려운 모험들은 어쩌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결정들인지도 모른다. 특히 관계를 향한 모험만큼 인간에게 치명적이고 위험한 것이 있을까. 엘리가 죽고 난 후, 추억의 집 속에 틀어박혀 있던 칼은 그제야 집은 그냥 집일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집안에 있던 물건들을 다 털어내고 자신의 새로운 모험을 향해 떠난다.


떠오르는 집을 잡아당기며 한 노쇠한 육체가 힘겹게 걷고 있는 풍경 속에 픽사는 저녁놀의 붉은 아름다움을 입힌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일상을 충실히 꾸려나가는 어른들을 위로한다. 누군가를 만나 결혼해 아이를 낳고, 돈을 벌며 삶을 살아내는 것. 우린 그렇게 인생이란 모험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업>은 누군가를 믿고, 책임지며, 기꺼이 희생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어른들의 모험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 여행에 기꺼이 들어가 일상을 충직하게 지켜내고, 소소한 것들을 누리는 것. 그 성실함이야말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가 아닐까.

영화 <업> 스틸이미지

앨범의 마지막 장, 사진 속 엘리는 창가에 책을 들고 앉아 창으로 비치는 한줄기 저녁 햇살을 바라보며 만족한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지도 모르겠다. 창밖의 세상이 아니라, 창안으로 비추는 한 움큼 햇살로도 우리 삶은 충분히 아름답다. 단지 우리 눈이 창밖 세상으로만 향해있어 그 빛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 칼과 러셀이 건물 모퉁이에 나란히 앉아 먹던 아이스크림의 맛을 나도 기억해 버렸다. 그리고 크래딧 자막이 다 끝날 때까지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아 하루 종일 부은 얼굴로 시큰한 감정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투명한 물 사이로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던 일상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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