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리틀선샤인'이야기
여행은 사람들의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사람들은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우지만, 막상 여행 중에 얻게 되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실패들로 얻게 되는 것들입니다. 분명히 평소에 일어났더라면 힘겹고 짜증나는 일들이 묘하게 여행 중에 벌어졌을 때는 용인이 됩니다. 마치 여행은 자발적으로 더 고생스럽고, 더 불편한 경험들을 수집하러 가는 것만 같습니다. 잠 한숨을 제대로 못자고 죽을 만큼 위험한 상황을 겪어내고도, 여행 중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겨놓습니다. 여행은 목적지에 가는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모든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미스리틀선샤인>의 콩가루 가족들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크고 작은 불편들을 같이 공유하게 됩니다. 같이 살고는 있지만 서로의 사정에 일정한 벽을 쌓고 지냈던 구성원들은 몸을 부대끼면서 서로를 감각하기 시작합니다. 그 신호탄은 노란 미니봉고차가 고장 나, 가족들이 다 같이 차를 뒤에서 밀고 한 사람씩 올라타는 장면에서 이상한 활기를 띄면서 나타납니다. 모두의 힘이 들어가야 앞으로 나갈 수 있고, 다시 그 차에 올라타기 위해서 한명씩 손잡고 끌어주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올리브 가족은 그제야 여행에서 경험하는 설렘을 느낍니다. 그리고 리틀미스선샤인 대회 우승을 목표로 시작된 여행은 마지막에 도달해 전혀 다른 것을 이 가족들에게 선물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 같은 자기계발 강연을 하는 리처드(아빠)는 모든 사람들을 승리자와 실패자로 나누고, 무슨 일을 시도할 때 성공할게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그의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들도 어떤 식으로든 성공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첫 장면부터 올리브(딸)는 TV에 나오는 미스아메리카의 비현실적인 표정을 연습하고, 시니컬한 드웨인도 항공학교라는 목표 때문에 매일 고된 트레이닝과 묵언수행까지 참아내며, 수감자들이 날짜를 하루씩 지워내듯 현재를 지워갑니다. 올리브와 드웨인에게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시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여행의 시간은 내일도 먼 훗날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보고 만지고 맛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우선순위에 놓습니다. 어떤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지금 맛보는 아이스크림의 맛만큼 달콤할 수는 없습니다. 이 영화는 그것이 설령 쓰디 쓴 고통스러운 맛이라고 해도 지금 현재 나를 통과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어떤 것과도 바꾸지 못할 만큼 값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분명 올리브가 망설이다가 뒤늦게 맛보는 아이스크림 한입의 맛처럼 기쁨만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때론 인생의 어떤 시기들은 순간이동 하고 싶을 만큼 괴롭기만 할 뿐입니다.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애인에게까지 배신당해 자살까지 시도했던 프랭크(삼촌)와 색맹 때문에 항공학교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 드웨인(아들)은 함께 강가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소년은 삼촌에게 18살까지 자면서 이 시간이 그냥 지나가길 바란 적도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때 프랭크는 고통 받았던 시간이야말로 온전히 자신을 만들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던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합니다. “오! 네가 놓친 고난의 시간을 생각해봐. 고등학교? 네게 으뜸가는 고난의 시간일거야. 그보다 더 나은 고난의 시간을 찾을 수 없지.” 어쩌면 기쁨이 되었건 슬픔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지금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는 잡을 수 없는 현재 이 시간의 절대성입니다. 미래의 어떤 성공도 지금 이 순간의 환희와 설렘, 억울함과 쓰라림의 총천연색 삶의 표정들을 줄 수 없습니다. 현재의 고통을 대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그것을 외면하면서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그 순간들을 온전히 통과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드웨인의 말대로 미인대회, 대학, 직장 등 딱히 고등학교 시기뿐 아니라 인생의 많은 단계들은 제정신을 차리고 보면 웃기는 모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영화는 '리틀미스선샤인' 대회라는 황당한 바보짓을 비유해, 인생의 성공이라 부르는 보편적인 기준들의 허상을 풍자합니다. 다수가 시치미 떼고 어떻게든 맞춰가려는 기준에는 어떤 기형적인 폭력이 있습니다. 거기에 맞추기 위해 올리브의 가족들은 침묵하고, 인내하며, 무릎까지 꿇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공이란 행운 앞에 놓인 거대한 장벽을 인식하게 된 후, 이 루저 가족들은 침묵을 깨고 지금 하고 싶은 것을 그냥 합니다. 욕을 하고, 화를 내고, 마음 가는 대로 춤을 춥니다. 매순간 실패할까봐 불안했던 마음은 완벽하게 실패를 인정하고 나자 오히려 자유를 얻습니다. 여기서 이 영화가 희망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실패를 겪는 사람이 또 다른 실패자를 위로할 수 있다는 마법 같은 순간들에 있습니다. 올리브 가족들은 서로 무관심하게만 보이지만, 실은 자신이 있는 서 있는 위치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서로를 위로 합니다. 할아버지는 올리브의 두려움과 리처드의 실패를 토닥여주고, 올리브는 오빠 드웨인에게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그가 다시 차를 탈 수 있게 만듭니다. 프랭크의 시니컬한 유머는 드웨인이 오히려 자신의 속마음을 편하게 꺼내놓고 쿨하게 욕하며 웃을 수 있는 드넓은 호수가 되어줍니다. 목표중심적인 리처드까지 올리브가 무대 위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자, 딸이 마음을 다치지 않고 춤을 마칠 수 있도록 그냥 옆에서 더 열심히 망가져서 춤을 춰줍니다. 이때 모든 가족들이 한명씩 무대로 올라가서 엉성하게 막춤을 같이 춰주는 장면은 올리브 가족들의 깊은 속내를 반전처럼 보여주며 감동을 줍니다.
대부분 인간의 삶은 성공의 정점에서 짧게 반짝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가장 비루하고 외로운 시간들까지 통과하고 나서야 소멸하게 됩니다. 하루도 일주일도 10년도 아니고 굳이 인간에게 80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데에도 어떤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올리브 가족의 1박 2일 여정에도 죽음과 절망의 소란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데, 하물며 80년이란 긴 세월에는 얼마나 무수한 고통의 흔적들을 새겨지게 될까요. 혹시 그 긴 생의 과정들은 일정한 실패의 순간들이 쌓여가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 때문에 필요하지 않았을까.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막상 그런 일이 벌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순간들을 가르쳐 준다는 데 있습니다. 삶은 여행처럼 모든 것을 종착지에서 찾지 않고, 지나오는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걷는 이 길은 아무리 고단하고 피로해도 어쩌면 하나의 춤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 가장 어렵고 힘들게 연습했던 스텝이 결국 삶의 고비에 준비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춤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