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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May 06. 2021

삶의 스펙트럼을 오래 바라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걸어도 걸어도> 이야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일을 계기로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감독은 어머니가 쓰러지신 후 2년의 시간동안 침대 머리맡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영화대사로 넣고, 실제로 자신의 자전적인 감정들이 영화 속에 많이 반영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걸어도 걸어도>는 추억을 회상하듯 일본 전통가옥을 배경으로 유머러스한 어머니가 등장하고, 집에 오는 걸 껄끄러워 하는 아들이 나온다. 카메라는 무겁지 않는 태도로 그 집을 비추면서, 그 가족이 요리하고, 밥 먹고, 얘기하는 소소한 풍경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본다. 아마 카메라로 추억 어린 사물들을 응시하면서 감독 자신이 어머니에게 다 전하지 못한 감정들을 위로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전작 <원더풀 라이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 하나를 남겨두고 생의 미련을 떨쳐버리듯이, 감독 스스로가 기억을 불러내어 만드는 상처의 치료제와 같다.

<걸어도 걸어도>  스틸컷

<걸어도 걸어도>는 장남의 기일 날 모인 세가족의 평범한 하루 동안의 모습을 별 기교 없이 보여준다. 어머니와 딸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놀고, 아버지와 아들이 마땅히 할 이야기 없이 앉아있는 풍경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웃음과 평온함 뒤에는 숫한 균열들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아들 료타(아베 히로시)는 직장에서 해고된 걸 숨기고 집에 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고,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어머니(기키 기린)는 아들까지 데리고 재혼한 며느리(나츠가와 유이)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며느리 또한 아들 료타 잠옷까지 챙기면서, 자신과 자기 아들에게 거리를 두는 시어머니가 서운하기만 하다. 딸(유)네 가족은 어떻게든 부모님 집에 들어와 살려고 하는데, 부모들은 그것을 흔쾌히 허락하기 싫어하는 눈치다. 겉으로 웃고 있지만, 가족들의 속마음은 모두 제각각 어긋나 있다.


특히 이 가족 중 가장 밝고 너그러워 보이는 인물인 어머니는 마치 양파껍질처럼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웃는 얼굴 속에는 오래된 증오를 품고 있고, 아무렇지 않은 듯 하는 말에 비수를 숨기고 있다. 그 오랜 세월 한 가족을 꾸리며 살아낸 어머니 삶의 명암처럼 그녀의 눈빛에도 굳은 마음에도 잔인함과 비정함이 고스란히 어려 있다. 감독은 ‘증오할 대상조차 없으면 어떻게 삶을 버티겠니.’ 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눈빛 속에서 공포와 쓸쓸함을 동시에 발견한다. 사람의 뒷모습과 옆모습을 응시하는 순간, 그동안 깨닫지 못하던 무수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걸어도 걸어도>  스틸이미지

무와 당근, 빨간 꽃, 칫솔을 보여주듯이 카메라는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을 정물을 관찰하듯이 편견 없이 비춘다. 사람들은 웃고 있지만 어색해 지기도 하고, 화낼 때도 있으며, 서운해 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혼자 있을 때 숨어서 듣는 노래처럼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고레에다 감독은 햇빛에 반짝이는 꽃의 투명함을 묘사하듯, 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일상의 빛을 기록한다. 그 속에는 명도가 높아 밝은 부분도 있겠지만 분명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어두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감독은 그렇게 복잡하고 비루한 사람들의 삶에 스펙트럼을 비추며 그 속에서 수만 가지 빛깔을 본다. 그 선한 시선 속에는 연민이 흐르되 냉소가 스며들 여지는 없다.  

영화는 마지막에 료타 가족이 탄 버스가 떠나고 그 자리에 남은 부모들이 터덜터덜 언덕을 걸어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모습을 배경으로 료타의 나레이션이 나오고, 음악이 흐르면서 영화는 끝날 듯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에필로그처럼 시간이 흘러 어느덧 4명이 된 료타가족이 다시 장남의 묘에 성묘하는 장면을 덧붙이고야만다. 료타는 예전에 어머니가 했던 그대로 비석에 물을 부어주고, 딸아이에게도 똑같이 노란나비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그들이 차를 타고 떠난 뒤, 카메라가 위로 계속 올라가면서 바다가 보이는 마을의 전경이 보이고 크레딧 자막이 흐른다. 아마 계단을 오르는 부모의 뒷모습이 마지막 장면이었다면 여운이 더 많이 남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뒤늦게 깨닫게 된 스모선수의 이름처럼 꼭 다 지나가고 나서야 후회가 되는 안타까움의 정서가 더 쓸쓸하게 전달됐을지도 모른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장면

하지만 감독은 그 후회를 넘어서 앞으로도 계속 남아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말한다. 마지막에 산위에 있던 카메라가 계속 올라가 바다까지 비추는 장면은 모든 것을 초월한 삶이 아니라, 끝끝내 이 땅에 남아 지나간 이들을 그리워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걷고 걸어야할 사람들의 심정을 보여준다. 어떤 기적도 초월도 없이 이 지루하고 긴 삶은 무심하게 흘러갈 것이다. 부재와 결핍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영화는 그렇게 계속 가야하는 사람들 앞에 남아있는 긴 기다림을 초라하게 비추면서 끝난다. 이것은 섣부른 위로가 아닌, 같이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내뱉는 담담한 토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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