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와 짧은 추억을 눈에 담다
아이들이 청소년기가 된 후, 남편은 아이들 어린 시절이 그립다는 말을 자주 반복해서 말했다. 5살 때 버찌가 솜사탕 먹는 입 모양 진짜 귀여웠는데, 그땐 앵두가 너무 작아서 항상 품에 안고 잤는데…. 처음에는 외로워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흘려들었는데, 라떼토크가 너무 자주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남편이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옛날만 그리워하고 있으면, 지금 이 순간에 반짝이는 것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물론 어릴 적 앵두와 버찌는 참 작고 귀여웠다. 나도 기억한다. 터질 듯한 볼살에 3등신 몸집, 활짝 웃는 세모 입, 당연히 깨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외모다. 아주 작은 꽃이나 곤충도 신기하게 지켜보고, 사소한 것들로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순간도 기억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아이가 어느새 키가 훌쩍 커버려, 이제는 게임과 친구 외에 모든 것들이 귀찮은 사춘기가 됐다. 이제는 바다도, 개구리도, 가족여행도 그다지 예전만큼 아이들을 벅차게 만들지 않게 됐다는 걸 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때는 그때의 어려움과 즐거움이 있었다면, 지금은 또 지금 맞닥뜨리게 되는 고민과 기쁨이 있다.
사실 난 솔직히 말하면 그때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건 싫다. 유년 시절의 아이들과 뒷산과 놀이터에서 썰매를 타거나 눈사람 만들며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놀았던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는 건 좋지만, 굳이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남편은 그때 주말이나 휴가 때 아이들과 잠깐씩 여행지에서 놀았던 기억 때문에 자꾸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온종일 아이 옆에서 놀아주지 않아도 되고, 매일 놀거리와 먹을거리를 고민하지 않아도 됐으니, 좋았던 기억들로만 꽉 채워져 있을 거다. 유아와 어린이를 키우는 일이 광고 속의 한 장면처럼 우아하고 해맑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현실의 육아는 한 사람의 끝없는 노동력이 투여되는 쉼 없는 돌봄의 현장이다. 그때 아이들 사진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지만, 난 그냥 지금 이 순간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게 좋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같이 침대에 뻗어서 쉴 수 있어서 좋고, 뉴스나 영화를 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어느새 키만큼 머리도 훌쩍 커버린 아이들과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 소식, 웃기는 농담 등 동등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져서 좋다. 어느새 마흔이 넘어버린 내게도, 나이가 20살도 훨씬 넘게 차이 나는 친구가 생겼다. 물론 가끔 소소하게 감정이 상할 때도 있지만, 어느새 나는 10대들이 아는 유행과 옷, 음악, 맛집, 유튜버 등을 저절로 알게 됐다. 이 아이들이 아니면 최근 유행하는 힙합에 대해, 디저트에 대해 어디 가서 떠들 수 있을까. 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의 특권은 그 시절 아이들의 감성과 생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 어른이 자신의 잣대로 청소년의 삶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면, 나의 지나간 10대를 내 아이를 통해서 새롭게 다시 체험해 볼 수 있다. 5살 어린아이의 부모가 공룡에 대한 가장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16살 청소년의 부모도 힙합 레이블과 아이돌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시절을 사는 것이다.
아이들의 유년 시절이 그렇듯, 청소년기 시절도 아마 금방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 옛날 아이들 모습만 그리워하며 계속 되돌아보는 사이, 지금 내게 봄 햇살처럼 빛나는 시간도 순식간에 우리 옆을 지나쳐 간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만 기억하고 과거에만 갇혀있기에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
작은 몸집으로 부모에게 안기던 아이는 이제 부모와 조금은 떨어져서 동등하게 대화란 걸 하고 싶어 한다. 제 생각과 느낌을 들어주고,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겐 자아를 구축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도 필요하지만, 존중받으며 나를 표현할 수 있는 테이블도 필요하다. 기성세대의 눈으로 아이들을 쉽게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마음의 빗장을 어느새 스르륵 푼다.
아마 그렇게 한 공간에서 별거 아닌 일로 시시덕거리다가 다투고, 다시 바보 같은 해프닝을 벌이고는 한바탕 배아프게 뒹굴 수 있는 얘기 거리를 쌓아갈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냥 짧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현재를 만끽하고 즐겨야 한다. 지금 이 시절의 아이들과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걸 함께하고, 시시콜콜한 추억들 앞에 겸손해야 한다. 별거 아닌 게 아니라, 별거 아니어서 참 감사한 시간이 지금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
미국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이제 대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기숙사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겨서 자기가 어린 시절부터 살던 방을 쿨하게 떠나고, 그 방에 덩그러니 남은 엄마가 홀로 흐느껴 우는 신이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막연히 느끼는 어떤 외로움을 분명 미래의 나도 언젠가 느끼게 되겠지. 하지만 아이와 이별의 시간이 올 때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마다 내가 충실하게 쌓았던 추억들로 한 시절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며 기쁘게 웃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성장한 만큼 나도 성장했을 거다. 그리고 어떤 시간을 함께 헤쳐나갔던 아이의 독립 앞에서 벅차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지나간 시간이 아깝지 않게, 이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올해 핀 벚꽃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지금을 눈에 잘 담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