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랜토리노>를 생각하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는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무장해제 시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영화가 끝나면 이상하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지는 게 아니라, 한참동안 한숨만 새어나온다. 전혀 색다를 것 없는 형식과 단순한 대립구조를 가진 그의 이야기가 매일 숱한 영화를 접하는 평론가들까지 머리 숙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고집쟁이 할아버지 앞에서 왜 우리는 벙어리가 돼 버리는 걸까.
이제 막 아내의 장례를 치른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옆집에 베트남 흐멍족 가족이 이사를 오게 된다. 과거 한국전쟁에 참전해 훈장까지 받았던 월트는 자기 구역을 침범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보수주의자다. 그런데 옆집의 타오라는 소년이 갱단의 사주를 받아 월트가 애지중지하는 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 들킨다. 이렇게 시작부터 뒤틀려 버린 그들의 관계는 갱단에 끌려가려던 타오를 의도치 않게 월트가 구해주게 되면서 점차 가까워지게 된다. 타오에게서 선한마음과 성실함을 보게 된 월트는 그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는데, 갱단 아이들의 폭력은 계속되고 이에 화가 난 월트도 똑같이 힘으로 대응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리액션은 더한 비극을 초래하고, 결국 마지막에 월트는 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모종의 결단을 내리게 된다.
월트는 인종편견이 담긴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욕이 섞인 거친 언어 정도는 써줘야 진짜 남자라고 생각하는 마초기질 다분한 할아버지다. 영화는 이렇게 자기 구역 안에서 그 누구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던 그가 외계인만큼 낯선 동양인들에게 마음을 열고 소통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수민족들이 자기 잔디밭에 들어오는 것도 경계하던 월트는 이웃집 파티에 초대받아 흐멍족 음식을 먹기도 하고, 나중에는 그 집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바비큐 파티까지 함께한다. 그러나 이렇게 타자와의 화해를 보여주는 것 같은 영화에도 감독은 분명한 선을 그어놓고 있다. 영화 후반부, 월트는 흐멍족 갱단 아이들을 보면서 ‘저것들은 가망이 없어’ 라고 몇 번씩 되뇐다. 이스트우드의 영화에는 도저히 포용할 수 없는 악의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라는 외연은 더 넓어졌지만, 기어코 적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진보적이라 보긴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는 합리적 보수주의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와 윤리가 들어있다.
이 노장 감독이 그리는 선과 악의 세계에는 이상하게 말을 멈추게 만드는 울림이 있다. 그것은 ‘악’에 맞서는 그의 태도가 오로지 외부의 대상으로만 향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내부의 ‘악’인 자신의 죄의식을 바라보고, 세상 속에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근본적인 ‘악’, 고통의 문제까지 파고들어 간다.
이 영화는 월트가 한국전쟁에서 겪은 일 때문에 일평생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생전의 그의 아내에게 부탁을 받은 젊은 신부는 그를 계속 찾아와 고해성사를 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형식적으로만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할 뿐 끝끝내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실제로 월트가 제대로 고해성사를 하는 곳은 따로 있다. 씨네21 정한석 기자는 이 영화 속에서 은연중에 지나가지만 월트가 지하실에서 타오를 가둬놓고 격자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장면이 그가 진심으로 자기 방식대로 행한 고해성사라고 말한다. 갱단에게 복수하러 가기위해 자신을 찾아온 타오에게 월트는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돼.” 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 그 아이를 거기 가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코왈스키식의 회개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월트는 ‘용서=구원’ 이라는 단순한 도식의 종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이 심지어 죄의식으로 얼룩진 쓰디쓴 삶의 지속을 감수하는 것일지라도 쉽게 털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고행이다. 그리고 이 근심을 통해 월트는 비로소 외부와 만나게 된다. 그가 동양인 타오를 유사 아들처럼 아끼고 보호하는 근본 원인은 아마 그의 이런 죄의식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용서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젊은 신부에게 월트는 구원에 대해서는 당신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그가 주문 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 선과 악의 문제까지 넘어서 우리를 더 깊은 고민으로 끌어 들인다. 결국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환경과 조건의 연쇄적 반응을 통해서 악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면, 사람이 뭔가 책임지고 용서를 말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 한가운데서 도대체 인간은 현재를 선택하며 살 수나 있을까. 삶과 죽음을 달콤함과 씁쓸함이라고 가르치는 신부의 설교에 월트는 한숨을 쉰다. 그리고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삶을 말하고, 지난한 삶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을 실제로 보여준다.
이스트우드는 세계의 심연을 바라보지만, 그 안에서 현실을 책임지고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를 말한다. 그것은 지금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지금 여기서 희생할 수 있는 어른의 책임감이다.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한다. 그것은 홀로 높은 곳에 올라가 현실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상(理想)이 아니라, 이 땅에 발 딛고 서서 끈질기게 가능한 것을 붙잡아 보려는 노력이다. 선택의 어려움을 끝까지 회피하지 않고, 이 노인은 기어이 자기식의 답을 정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긴다. 이것이 자기가 가진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희생’이 되었을 때, 진보나 보수를 넘어 어떤 숙연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묘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전작들이 겹치는 이 영화는 마치 감독이 직접 쓴 유언장을 보는 듯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인생의 종착역을 목전에 둔 노인이 보여주는 작은 시선의 변화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스트우드는 낯선 이방인인 베트남 가족의 삶을 스케치하고, 그의 분신인 월트는 자신을 내어줌으로 동양인 아이에게 비로소 삶을 준다. 근본적으로 ‘희생’이 전제되지 않는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스트우드가 말하는 희망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진 않지만, 치열한 고민과 선택위에서 삶을 책임져가는 끈덕진 노인의 통찰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타오는 월트가 그토록 아끼던 ‘그랜 토리노’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린다. 그 위로 이스트우드의 낮게 읊조리는 허밍이 들린다. 무심한 듯 그 길 위로 수많은 차들이 지나가고 어느새 그 노래는 젊은 가수의 목소리로 이어지지만, 카메라는 그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그 풍경을 쓸쓸히 바라보던 관객들 또한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끝났지만,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삶은 지속된다. 이제 끝을 바라보며 서있는 감독은 그 길을 오래 견뎌내야 할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섣부른 희망도 냉소도 아닌, 위로와 안식의 노래를 불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