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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Apr 25. 2021

기다림, 시간을 감각하는 주문

영화 '만추' 이야기

<만추>는 시간의 흐름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애나의 얼굴을 끈질기게 포착하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할 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단호한 표정으로 종이를 씹던 애나는 7년 후 감옥 철창문 사이로 감각이 마비된 얼굴로 멍하니 카메라를 바라본다. 전화로 엄마의 부고소식을 듣는 순간조차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던 애나가 갑작스럽게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주변의 모든 감각에 그녀는 무방비로 노출된다. 김태용 감독은 애나의 표정에 어색하게 머물다 지나가는 작고 사소한 자극들을 촉각적으로 보여준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애나가 먹는 과자가 서걱거리며 부서지는 느낌, 추위에 떨던 애나가 뜨거운 커피를 두 손에 들고 마실 때의 온도와 떨림이 그대로 느껴진다. 미풍에도 살며시 흔들리는 애나의 앞머리 한 두 가닥, 창가에 앉아있던 그녀의 이마에 쏟아지는 햇볕의 나른한 피로와 설렘의 공기도 손에 잡힐 듯하다. 쇼윈도에 걸린 옷을 보고 안에 들어간 애나는 털옷의 촉감에 얼굴을 부비고, 귓불에 스치는 아픔을 느끼며 귀걸이를 꽂아본다. 하지만 예쁜 옷을 차려입자마자 울리는 위치 확인용 휴대폰 벨소리에 허둥대다가, 그 모든 일들이 그저 덧없음을 깨닫고 만다. 오랜만에 애나에게 찾아 온 자유의 시간도 이미 미래에 저당 잡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집에 처음 온 날, 마당에서 옛 애인을 재회한 애나는 그에게 예전의 어린아이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냐고 묻는데, 그는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며 말을 돌리고, 애나는 자기에겐 많은 일들이 없었다는 말을 한다. 7년을 감옥에만 있던 애나의 시간은 그 이후로 그냥 멈춰버 린 것이다.

훈은 애나를 처음 만났을 때, 차비를 빌리고는 자신의 시계를 맡긴다. 그 뒤로도 애나가 훈에게 돈을 주려고 할 때마다 훈은 애나에게 계속 시계를 준다. 훈이 여자들에게 하는 일은 이야기를 들어주며 시간을 선물해 주는 것이다. 애나는 훈과의 놀이를 통해서 자신이 잃어버렸던 시간들을 가상의 순간들로 복기한다. 애나와 훈이라는 이름만을 놔둔 채, 그들은 장소를 바꾸면서 다양한 사람을 연기한다. 레스토랑에 가서는 생일을 기념하러 온 부부가 되고, 놀이공원에서는 사랑싸움하는 연인들의 대화에 더빙을 입히며 논다. 애나는 훈과 시간을 보내면서 타임캡슐에 묻어 놓았다 잘못 돌아온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지난 일들로 인식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 말들이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훈에게 전달되어 좋음과 나쁨의 반응이 역전되었을 때, 애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불행이나 행복이라고 믿었던 사건들의 의미도 끊임없이 변하게 된다는 걸 깨닫는다.


특히 놀이공원에서 외국인 연인들이 대화하는 장면은 극장 스크린처럼 프레임 되면서, 마치 영화 속에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여자가 앞에 걸어가고 남자가 그 뒤를 따르지만 러닝머신 위에서 제자리걸음이 계속 되듯, 두 사람은 평행선처럼 서로 닿지 못한 채로 계속 같은 길을 걷는다. 그 사이에 해가 지면서 노을이 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는다. 범퍼카에서 그걸 지켜보는 애나의 시간이 멈춰있다면, 프레임 속에 흐르는 시간은 다양한 빛깔을 띠고 순간순간 변해간다. 감옥에서 멈춰 버린 시간에 무감각한 삶을 살던 애나는 영화 같은 그 장면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의 아름다움을 감각하게 된다. 이것은 <가족의 탄생>에서 어린 채현이 마당을 깡충깡충 뛰고 있을 때,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이때도 마루에서 밥을 먹고 있는 두 여자의 시간은 변화가 없는데, 형철을 기다리던 채현의 시간만 빠르게 변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비로소 시간을 감각하기 시작한다. 레일 위를 걷던 두 남녀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기다리고 있는 순간, 채현이 100까지 세면서 형철을 기다릴 때, 똑같은 풍경 속에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만추>의 환상장면이 'wait‘ 란 주문으로 시작하듯, 애나도 훈의 'wait‘ 란 외침으로 환상을 재연하듯 숨 차오르게 복도를 뛰면서 삶을 온몸으로 감각하기 시작한다. 김태용 감독은 영화 보는 행위를 통해, 가상 속에서 시간의 상처들이 은유적으로 치유되는 과정을 <만추>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이후, 애나는 감옥에 들어가기 전 원래 자신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다. 모텔 안의 부서진 화장실 문에 머리를 대보면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관에 누워있는 엄마 옆에 앉아 못 다한 이야기를 한다. 훈이 모텔에 뒤늦게 도착했을 때, 애나는 이미 사라졌지만, 애나가 침대 위에 놓고 간 시계에서는 시침소리가 크게 울린다. 멈췄던 애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롱테이크로 찍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의 감각을 섬세하게 연출한다. 창밖의 버스를 지켜보던 카메라가 서서히 왼쪽으로 이동하면 그것을 보던 애나의 얼굴이 비춘다. 카메라가 훈을 기다리는 애나를 오래 지켜볼 때, 문이 열리고, 의자가 삐걱대고, 책장을 넘기는 작은 소리들이 주변에 서걱거린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일상의 모든 감각들을 되살려내, 희미한 조짐과 흔적들 속에서 시간의 결을 새롭게 감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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