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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May 02. 2021

당신을 살게 하는 것

영화 '밀양' 이야기

 행복과 불행은 늘 꼬리표처럼 삶에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불행과 행복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은 봄날 얼굴을 스치는 바람처럼 인지하는 순간 바로 사그라지고 만다. 그 나머지 시간, 단지 우리는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전도연)를 보면 딱 그런 생각이 든다. 행복한척 하는 노력도 아니고 불행해 보이고 싶지 않은 노력이라니.... 어쩐지 참 씁쓸한 시작이다.


영화의 첫 장면, 밀양으로 가는 도중 차가 고장 난 신애는 카센터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한다. 아마 당시 그녀의 처지가 딱 그러했을 것이다. 믿고 있던 것이 흔들렸을 때, 일단 안간힘을 다해 내가 지금 서 있는 위치를 인정받기 위해 신애는 밀양으로 향한다. 하지만 ‘비밀의 햇볕’이란 뜻을 가진 밀양에서도 신애를 향한 뜻은 잔인하기만 하다. 유괴로 아들까지 잃게 된 신애가 그 자리에서 토해낼 수밖에 없는 질문은 “그럼 왜 신은 아무 죄도 없는 우리아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을까요?” 라는 원망밖에 없다. 신애는 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홀로 목도하고 삭히며 버텨낸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욥이 그러했듯이, 신애를 보는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고통을 해석하려 한다. 그게 다 남편 죽이고 자식까지 죽인 너 때문이라고 책임을 추궁하기도 하고, 그래도 그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며 가르치려고 한다.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든 몸을 지탱할 기둥이 필요했던 신애는 신의 뜻 안에서 자신의 불행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본다. 

영화 '밀양' 스틸컷 중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은 가장 힘든 일들이 닥치는 순간이다. 바로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잔인한 일들에 아무 의미가 없음을 인정하며 생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라는 물음에 어떻게 해서든 삶과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숨어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그 ‘왜’라는 질문에 주어진 답은 늘 허기지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후 다시 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지 않고, 때로 어떤 사고는 불구의 상처와 장애를 남긴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남아있는 시간은 상실된 마음을 그저 음미하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경험하는 가장 큰 기적은 우리가 그래도 그 삶을 살려고 하고, 그렇게라도 살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어느 순간 계절이 변해 동물들이 털갈이를 하듯, 지나간 불행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받아들이게는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의지했던 신에 대한 원망으로 자살까지 시도했던 신애의 입에서는 저절로 ‘살려주세요’ 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하나님은 자신을 버린 것만 같고, 그 밤거리에는 그녀를 도와줄 것 같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지만, 신애는 본능적으로 살려고 한다. 자신을 지탱해 왔던 모든 의미가 사라진 후에도 비루한 삶을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는 명분하나 없는 텅 빈 마음에도 살고 싶은 의지가 그녀를 버티게 한다. 중국작가 위화는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서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을 했다.  정말 인간은 불행까지 합리화 하면서 삶에 의미를 부여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지 모른다. 어떤 의미조차 삶의 예측할 수 없는 파동 앞에서 언제든 쉽사리 부서진다. 물고기가 물속을 하염없이 헤엄치듯, 우리는 하루하루 별 이유 없이도 그냥 살 수 있을 뿐이다.


밀양에 처음 와서 신애가 종찬에게 밀양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자, 종찬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살지요.” 그 이후 영화 속에서 종찬은 마치 햇볕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신애 삶을 조용히 맴돈다. 딱히 신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사건과 관련도 없는 종찬의 역할은 이 영화가 말하는 가치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신애에게 종찬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을 만한 감정적 친밀감도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종찬은 허허실실 속없이 늘 몇 걸음 뒤에 떨어져 신애 곁에 서 있다. 마치 아이가 유괴당한 후 거실소파에 누워있던 신애를 비추던 햇볕처럼 종찬은 그녀가 몸부림치는 고통의 순간을 우직하게 지킨다. 불행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보이지 않는 햇볕 한 조각의 비밀 때문이 아니라, 너무 흔하게 눈에 띄어 인식조차 하지 못하지만 우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이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신애는 우연히 이웃주민을 만나서 “미쳤는갑다"라는 말을 듣고는 실없이 같이 웃고 만다. 말실수를 깨닫고 바로 입을 막는 이웃여자의 솔직한 유대감에 신애는 처음으로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게 웃는다. <밀양>에서 가장 온기 있는 이 장면은 이 영화가 가느다랗게 꺼내놓은 희망과 같은 것이다. 바닥을 치고 치다 더 이상은 내려갈 곳 없는 절망에 닿았다고 생각했을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여전히 솟아나는 작은 물줄기를 발견할 때의 안도와 비릿한 슬픔이 겹친 순간이다. 

실없이 삐져나오는 것들, 전혀 마음 두지 않고 지나쳤던 모든 것들은 나란 존재를 철벽처럼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영화 ‘밀양’은 삶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보게 한다. 그 순간 인생의 이름표를 다는 일은 도덕 객관식 문제를 맞히는 것만큼 허망한 일이 돼 버린다. 어쩌면 당신이 정말 필요했던 것은 정답이 아니라 그저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작은 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냥 살게 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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