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바웃어보이> 이야기
로맨틱코미디에 등장하는 휴그랜트의 캐릭터가 여럿있는데, 사실 가장 휴그랜트스러운 캐릭터가 나온 영화를 말하라고 하면 딱 '어바웃어보이'에 나오는 윌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남겨 준 저작권료로 한평생 돈 걱정없이 백수처럼 살아도 아무 지장 없이 사는 남자 주인공 윌. 사람들은 모두 각자 자기만의 섬에서 살아간다고 믿는 윌의 백수생활은 휴그랜트의 스마트하고 건들건들한 연기에 녹아들어 솔직히 부럽기까지 하다. 홀로도 충분할 수 있는 환경조건과 개인적인 성격까지 갖추고 있는 윌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 초반의 장면들이 휴그랜트의 쿨한 이미지와 맞물려 충분히 설득력을 발휘한다. 중반 이후 윌이 느끼게 되는 결핍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초반 설정이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즐거웠어야 했는데, 그런 면에서 철없는 어른 컨셉의 윌의 삶에는 어떤 면에서 그 자체로도 완결된 가벼움이 있다.
영화는 가볍게 관계를 맺고 헤어지는 표면적인 관계에 익숙해진 윌의 세계에 12살 소년이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윌과 마커스가 친하게 되는 작은 디테일도 좋다. 불편하고 짐 같았던 존재가 자신의 공간에 침입해 들어와서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냥 익숙해지는 순간을 그린다. 방과 후에 힘없이 찾아온 마커스와 윌은 말없이 TV를 보고, 잼 바른 토스트를 나눠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윌은 마커스가 고민하는 큰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신발을 골라주거나 랩음악을 골라주는 아주 사소한 것을 도와주는 것으로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미 한 사람에게 열어 준 마음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는 쉽다. 마커스가 윌의 집 문 앞에 나타난 이후로 그제야 윌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원하게 되고, 실연에 아파하는 결핍을 느끼게 된다.
윌이 자신만의 고통에 함몰되어 있을 때, 마커스 또한 뿌리 깊은 절망의 늪에서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고통받고 있을 때 인간은 철저하게 혼자가 된다. 윌이 마커스를 통해서 얻었던 관계에 대한 작은 희망도 한계에 부딪힌다. 윌은 자신이 신발이나 음악을 골라주는 사소한 일들을 도와줄 수는 있는 사람이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영화에 나오는 명언처럼 인간은 따로 떨어진 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나의 고통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고, 그 문제를 진정 해결할 사람은 나 외에 아무도 없다. 마커스 엄마가 앓고 있는 우울증처럼 때로 고통은 아무 예고도 없이 나타나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우리를 한꺼번에 흔들어버린다. 정확히 말해서 고통에 위로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홀로 온전히 앓는 도리밖에 없다.
윌이 홀로 방안에 틀어박혔을 있을 때, 마커스는 엄마를 지켜보며 홀로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뭐라도 해보려고 한다. 울고 있는 엄마에게 단 한 순간이라도 햇살이 되고 싶어, 탬버린을 들고 무대 위에 서 보려고 한다. 윌은 뒤늦게 마커스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고 그의 무모한 무대를 말려보려고 하지만, 소년의 단단한 각오를 보고는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마커스와 함께 기꺼이 웃음거리가 된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망가져 버린다. 마커스의 노래가 다 끝나고도 윌이 끝까지 노래를 부르다 망신당하는 섬세한 연출도 맘에 든다. 철부지 윌이 그 순간은 진짜 아빠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무 문제도 해결해줄 수 없지만, 그 문제는 여전히 당신 섬에 남아있지만, 그 섬이 흔들릴 때 나의 섬에도 이상한 변화가 생길 때가 있다. 울고 있는 그 사람에게 잠시나마 햇살이 비치고, 어깨가 들썩이고,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그 순간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난 경험이 있다면 분명 당신도 그 문을 열고 나올 수밖에 없다. 뭘 해볼 수도 없이 내 힘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소중한 사람이 홀로 우스꽝스러운 취급을 당하고 있다면 무대 뒤에 숨어서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다. 비를 함께 피할 수 없다면, 옆에서 그 비를 함께 맞을 수밖에 없게 우리를 붙드는 사람이 있다. 그 섬이 연결돼 있다는 증거다.
한 명으로 부족한 삶이란, 결국 나의 욕망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지만, 나도 모르게 당신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을 때, 한순간 내 삶도 회복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물 한 방울의 도움도 되지 못하지만, 때론 가느다랗게 연결된 당신의 숨소리가 지금 이 위태로운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섬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를 버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