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뛰어넘어 롤모델을 만나다

책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읽으며

by 달팽이

친구가 선물로 건네준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책을 읽고 있다. 먼 시간을 앞서간 여성들과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25명의 여성 작가들은 모두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글을 쓰며 살아왔지만, 치열하게 글 쓰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의지가 그녀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야기 한편 한 편을 읽으며 가슴에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시대와 국경, 나이를 초월해서 글을 쓰는 여성들이 건네는 말들에 신비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가 왜 이 책을 나와 딸에게 꼭 읽어보라고 건네줬는지 알 거 같았다.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글쓰기에 매달렸던 삶, 자기만의 방과 시간을 가질 수 없어 모두가 잠든 밤에 간신히 잡게 되는 펜, 누가 보게 될지조차 알 수 없는 문장 하나를 위해 머리 쥐어짜며 고심하는 시간들…. 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갖고 한 칸씩 앞으로 나갔던 여성들의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 이른 나이에 빛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작가도 있었고, 90세까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다 다음 책을 준비하다가 세상을 떠난 작가도 있었다. 이 책의 모든 여성들이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뭔가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모두 각자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읽고 쓰는 여성들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불합리함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진정 자유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프리다 칼로는 18세 때 교통사고를 당한 후 22번의 외과수술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지만,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매일 일기를 쓰며 생을 충만하게 불태웠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여드레 전에 남긴 그림의 제목은 ‘인생만세’. 다양한 무늬와 조각으로 한 여름의 빛과 열기를 생생하게 품고 있는 여러 개의 수박 그림. 평생 이어져 온 고통조차 무색하게 그녀가 얼마나 삶을 다채롭고 고유하게 바라보며 생을 용기 있게 끌어안고 사랑했는지 느껴진다. 왠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이 온다면 그 수박 그림을 꺼내서 오랫동안 보고 싶을 것 같다.


KakaoTalk_20210507_214143687_01.jpg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책에 실린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 <인생만세> 그림


에밀리 디킨스의 이야기는 세간이 갖고 있던 편견을 깨부순다. 독신으로 살며 40년 동안 집안에서만 은둔하며 글을 써왔다고 알려진 에밀리는 실은 돈과 시간이 남아서 한가하게 책을 보고 글을 썼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낮에는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편지로 지인들에게 마음을 전하고, 시를 쓰며 세상과 소통하려고 했다. 매일 시 한 편씩을 완성해 직접 책을 만들어 엮고, 신문에 지속해서 글을 투고했다. 하지만 그녀가 평생을 걸쳐 만들어낸 작품들은 당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고, 에밀리 디킨스가 세상을 떠난 후 70년이 지난 후에 마땅히 받아야 했을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 갔던 고요한 새벽의 문장들이 뒤늦게 독자들을 만났다.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의 일화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미국에서 여성으로 세 번째 대법관으로 지명된 소토마요르가 예전에 했던 말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긴스버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편을 들어준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녀가 하려고 했던 말의 뜻을 설득력 있게 해석해준다. “그녀는 아마 이 정도 의미로 말했겠죠. ‘여성들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차이점이 모이면 더 좋은 토론,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도, 유대인이란 사실도, 뉴욕 브루클린에 자란 사실도 그런 차이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녀의 말이 참 정확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일단 한 사람 안에도 다양한 삶의 정체성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여성뿐 아니라 모두가 각자가 가진 다양한 차이점을 들고 공론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온화하게 꼬집는 방식이 참 멋지다. 레이스 카라를 단 법관복을 입고 당당하게 선 그녀의 태도처럼 지적이고 세련된 말을 하는 긴즈버그도 불쾌한 악담에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글로 남겼다고 한다.

KakaoTalk_20210507_214143687_02.jpg 책에 실린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사진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나는 장영은 작가가 요약해 놓은 여성들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읽으며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했던 롤모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 이 책에 나온 그녀들도 더 열악한 시대에 약자이자 소수자의 삶을 경험하며 부당함을 고발하고 기록했던 또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을 것 같다. 삶과 글로 현재라는 감옥을 부수는 이야기들이 사상이 되고, 그 디딤돌을 밟고 그들은 조금 더 높은 곳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상과 이야기로 글 쓰는 여성들이 많아진다는 건 그 이야기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오고, 롤모델이 갔던 길을 따라가며 더 큰 꿈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여성들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쓴 글이 백 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나의 삶 앞에 멈춰 섰고, 조용하지만 깊게 심장을 두드렸다. 끈질기게 자기 인생과 생각 앞에서 당당했던 글 쓰는 여성들의 삶을 나도 살고 싶어 졌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좋을 삶을 잘 버텨내며 살고 싶어 졌다.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환경에 꺾이지 않고, 당당하게 나 자신을 인정하고 말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필과 노트, 도서관, 자기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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