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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May 07. 2021

시간을 뛰어넘어 롤모델을 만나다

책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읽으며

친구가 선물로 건네준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책을 읽고 있다. 먼 시간을 앞서간 여성들과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25명의 여성 작가들은 모두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글을 쓰며 살아왔지만, 치열하게 글 쓰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의지가 그녀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야기 한편 한 편을 읽으며 가슴에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시대와 국경, 나이를 초월해서 글을 쓰는 여성들이 건네는 말들에 신비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가 왜 이 책을 나와 딸에게 꼭 읽어보라고 건네줬는지 알 거 같았다.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글쓰기에 매달렸던 삶, 자기만의 방과 시간을 가질 수 없어 모두가 잠든 밤에 간신히 잡게 되는 펜, 누가 보게 될지조차 알 수 없는 문장 하나를 위해 머리 쥐어짜며 고심하는 시간들…. 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갖고 한 칸씩 앞으로 나갔던 여성들의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 이른 나이에 빛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작가도 있었고, 90세까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다 다음 책을 준비하다가 세상을 떠난 작가도 있었다. 이 책의 모든 여성들이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뭔가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모두 각자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읽고 쓰는 여성들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불합리함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진정 자유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프리다 칼로는 18세 때 교통사고를 당한 후 22번의 외과수술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지만,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매일 일기를 쓰며 생을 충만하게 불태웠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여드레 전에 남긴 그림의 제목은 ‘인생만세’. 다양한 무늬와 조각으로 한 여름의 빛과 열기를 생생하게 품고 있는 여러 개의 수박 그림. 평생 이어져 온 고통조차 무색하게 그녀가 얼마나 삶을 다채롭고 고유하게 바라보며 생을 용기 있게 끌어안고 사랑했는지 느껴진다. 왠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이 온다면 그 수박 그림을 꺼내서 오랫동안 보고 싶을 것 같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책에 실린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 <인생만세> 그림


에밀리 디킨스의 이야기는 세간이 갖고 있던 편견을 깨부순다. 독신으로 살며 40년 동안 집안에서만 은둔하며 글을 써왔다고 알려진 에밀리는 실은 돈과 시간이 남아서 한가하게 책을 보고 글을 썼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낮에는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편지로 지인들에게 마음을 전하고, 시를 쓰며 세상과 소통하려고 했다. 매일 시 한 편씩을 완성해 직접 책을 만들어 엮고, 신문에 지속해서 글을 투고했다. 하지만 그녀가 평생을 걸쳐 만들어낸 작품들은 당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고, 에밀리 디킨스가 세상을 떠난 후 70년이 지난 후에 마땅히 받아야 했을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 갔던 고요한 새벽의 문장들이 뒤늦게 독자들을 만났다.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의 일화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미국에서 여성으로 세 번째 대법관으로 지명된 소토마요르가 예전에 했던 말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긴스버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편을 들어준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녀가 하려고 했던 말의 뜻을 설득력 있게 해석해준다. “그녀는 아마 이 정도 의미로 말했겠죠. ‘여성들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차이점이 모이면 더 좋은 토론,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도, 유대인이란 사실도, 뉴욕 브루클린에 자란 사실도 그런 차이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녀의 말이 참 정확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일단 한 사람 안에도 다양한 삶의 정체성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여성뿐 아니라 모두가 각자가 가진 다양한 차이점을 들고 공론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온화하게 꼬집는 방식이 참 멋지다. 레이스 카라를 단 법관복을 입고 당당하게 선 그녀의 태도처럼 지적이고 세련된 말을 하는 긴즈버그도 불쾌한 악담에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글로 남겼다고 한다. 

책에 실린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사진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나는 장영은 작가가 요약해 놓은 여성들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읽으며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했던 롤모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 이 책에 나온 그녀들도 더 열악한 시대에 약자이자 소수자의 삶을 경험하며 부당함을 고발하고 기록했던 또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을 것 같다. 삶과 글로 현재라는 감옥을 부수는 이야기들이 사상이 되고, 그 디딤돌을 밟고 그들은 조금 더 높은 곳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상과 이야기로 글 쓰는 여성들이 많아진다는 건 그 이야기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오고, 롤모델이 갔던 길을 따라가며 더 큰 꿈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여성들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쓴 글이 백 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나의 삶 앞에 멈춰 섰고, 조용하지만 깊게 심장을 두드렸다. 끈질기게 자기 인생과 생각 앞에서 당당했던 글 쓰는 여성들의 삶을 나도 살고 싶어 졌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좋을 삶을 잘 버텨내며 살고 싶어 졌다.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환경에 꺾이지 않고, 당당하게 나 자신을 인정하고 말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필과 노트, 도서관, 자기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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