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휘도록 딸 둘을키워낸 엄마생각
엄마를 생각하면 늘 고되게 식당 일하던 모습 먼저 떠오른다. 잠을 못 자서 늘 퉁퉁 부은 얼굴로 고무장갑을 끼고 큰 다라이 한가득 김치를 다듬거나 양념을 묻히던 엄마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동생과 나의 엄마이기도 했지만, 육체노동자이기도 했다. 이십 년 정도 반월공단 염색공장 식당에서 일하셨다. 공장 식당은 직원들의 세 끼는 물론 야식까지 책임지고 있어서, 엄마는 함께 일하시는 두 분과 함께 3교대로 근무를 했던 것 같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을 할 때도 있었고, 야식을 준비하고 올 때는 조금 이른 오후에 퇴근할 때도 있었다. 지금 구부러진 엄마의 허리와 손등을 보면 그 당시 노동 시간뿐 아니라 노동 강도 자체가 얼마나 셌는지 알 수 있다. 그때 한창 철이 없던 내 시선에서조차 티 안 내는 엄마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 보면, 엄마는 그 시절에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이 안 간다.
사실 난 사춘기 시절에 참 이기적인 딸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너무 힘들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공부한다는 핑계로 제대로 집안일도 안 했던 것 같고, 내가 좋아하는 참 비실용적이고 이상적인 일들만 꿈꾸며 살았던 것 같다. 집에 친구들도 꽤 많이 데려왔다. 다니던 교회가 도보 5분 거리에 있었는데, 주말이면 교회 친구와 선배들을 잔뜩 끌고 와서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그냥 라면만 끓여 먹으려고 가겠다고 했지만, 뭐든 대충 하지 않던 엄마는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뚝딱뚝딱 대용량 요리를 만들어 늘 거나한 상을 차려줬다. 아마 그 당시 그 교회 다니던 청소년들 중 우리 엄마 밥을 안 먹었던 애들은 거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떠올려보면 나도 참 못되고 철없는 딸이었고, 우리 엄마는 참 속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친구들이 다 집으로 돌아간 후, 몸이 너무 안 좋을 때면 가끔 내게 긴 잔소리를 할 때도 있었다. 그때는 엄마에게 당연히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원망에 가까운 잔소리를 듣고 나면 괜히 나도 버럭 해서 둘이 감정이 상할 때도 많았다. 그때 엄마는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엄마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돌아보니 그땐 친구가 전부처럼 보였던 딱 사춘기였다. 지금 내가 세끼 밥을 차리는 엄마가 되고 보니, 그렇게 쉬는 날마다 끌고 오는 딸 친구 군단을 위해 제대로 된 밥을 차려주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아득해진다. 집에 온 아이들을 차마 쫓아 보내지도 못하고, 대용량 음식을 말없이 만들던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장면이 눈에 밟힌다.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는 독서실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놀고 있던 나를 위해 엄마가 김밥 10인분 정도를 찬합 가득 싸 온 적도 있었다. 그때 엄마가 독서실 건물 앞에서 무거운 찬합을 양손에 들고 뒤뚱뒤뚱한 자세로 나를 어정쩡하게 기다리고 서 있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땐 애들하고 같이 김밥 먹고 놀 생각에 참 철도 없이 즐겁기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새벽 6시에 나가 저녁 7시 넘어 퇴근하자마자 쉴 새 없이 저녁을 한 후, 또 엄청난 양의 김밥을 싸서 딸에게 전달해 주고, 다시 내일 아침과 도시락 4개를 준비하던 엄마의 삶을 그때는 제대로 상상해보지 못했던 거다. 그 맛있었던 김밥과 엄마의 무거운 발걸음에 어떤 사랑과 희생이 숨어 있었는지, 요즘 그런 장면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우리 엄마 참 곰 같이 사랑하고 퍼주기만 하는 사람이었구나. 서운해도 서운하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다 삭이는 사람이었구나.
난 엄마와 달리 요리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루에 한 끼 정도만 한다. 아침은 셀프로 각자 요거트나 콘프레이크, 빵을 알아서 먹고, 점심이나 저녁 한 끼는 사 먹을 때도 많다. 예전에 애들이 유치원 소풍 갈 때면 아침 일찍 김밥 도시락 싸는 게 거대한 행사였다. 김밥을 다 싸고 애들을 보내 놓고는 잠시 넋이 나가곤 했다. 그런 삶을 도돌이표처럼 살다가 가끔 엄마 생각이 난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면서도 어떻게 매일 국과 반찬을 차리고, 도시락 4개까지 세팅해 놓을 수 있었을까. 주말이면 우리 집에 쏟아지던 새까만 청소년들한테 싫은 내색도 없이 진수성찬을 차려줄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청소년 공간에서 몇 명의 교사를 하던 일을 우리 엄마가 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스친다. 뭐 대단한 여러 마디 말보다 우리 엄마가 입에 넣어준 그 거대한 음식들이 알게 모르게 그때의 우리를 붙잡아 주었는지도 모른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지금 혼자 살고 계시는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는 지금 내 나이 때 너무 많은 노동을 해서, 무릎, 허리, 어깨 안 아픈 곳이 없다. 코로나에 외롭지 않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쉴 수 있는 내 팔자가 지금 제일 좋은 때라고 말하는 엄마 말이 괜히 씁쓸하게 다가온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느끼는 잠시의 행복과 자유, 충만함을 떠올려봤다. 그 모든 것들이 그냥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 여성의 지독한 노동과 고된 삶, 눈물의 토대 위에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의 순간이 있었다. 나란 사람은 엄마가 일일이 손수 해먹이던 음식을 통해서 지금 존재한다. 그때 엄마가 전해준 충만한 것들이 지금도 내 몸에 흘러서 나는 조금 더 여유롭고 즐거운 사람이 됐다. 삶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어느덧 일흔이 넘은 엄마의 이야기를 이젠 더 듣고 싶어 졌다. 아마 엄마도 열심히 버텨내고 살아내는 것만도 벅차서, 자신이 일흔이 넘는 노인이 될 거라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을 거 같다. 엄마의 20대, 30대, 40대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 이야기로 그때의 엄마를 만나고 싶고, 입체적인 엄마의 모습들을 내 머릿속에 간직하고 싶다. 엄마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해져서, 활짝 웃는 백발의 주름진 엄마 모습을 더 많이 저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