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떠올리며
코엔형제가 만든 '인사이드 르윈'.
밥딜런이 활동했던 시대, 무명포크 가수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대개 좋은 영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도 다보고 나서 '이 묘한 기분은 뭘까?' 라는 첫인상으로 시작해서, 일상의 순간 순간 어떤 장면들을 계속 떠오르게 만든다.
사실 보고나서 너무 좋아, 하고싶은 말이 많아지는 영화에 대해 뭐라도 끄적이려고 마음을 잡으면 오히려 더 엄두가 안나는 경향이 있는데, '인사이드 르윈'은 부족하더라도 뭐라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전혀 두서없더라도, 순간순간 그 영화의 어떤 장면들이 마음에 이상한 여운을 남기고 갔던 이야기를 가끔씩 메모하려고 한다.
오늘 밤에 문득 떠올랐던 감정은 비겁함 이었다.
르윈이 잠시였을지라도 같이 동행했던 길고양이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고, 버려두고 가버렸을 때, 평소 쌀쌀맞기만 했던 진이 르윈에게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위해 치른 대가가 어떤 것인지 알고는 괜한 사람에게 어처구니 없는 난동을 부릴 때, 그 진상스러움과 비겁함이 너무 낯설지 않아 마음이 아파왔다.
보통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들을 처리할 때면, 르윈은 결국 그 고양이를 다시 데리러 올 것이고, 클럽사장한테는 다혈질 성질을 폭발하며 분노를 터뜨려야 할 텐데, 코엔형제가 창조한 인물은 뭐든 책임 질 수도 없고, 당연히 분노해야할 때조차 상대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소심한 복수로 자신을 되는대로 놓아버리고 만다.
드라마 플롯으로는 낯설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실제 보통 우리 삶이 다 이렇다. 누군가의 눈빛을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 분노는 절대 제 주인에게 가지 못하고 아무상관 없는 애매한 곳에 떨어진다.
뒤돌아서고나서야, 그때 내가 얼마나 비겁했는지를 아프게 깨닫게 될 뿐이다.
그렇게 다 하지 못한 말들이, 내가 끝내 털어내지 못한 죄의식들이 부유물이 되어 끝까지 목구멍에서 남아 넘어가지 못할 때, 삶은 진기한 예술의 풍경을 그려낸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르윈이 은빛 가스등 아래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가 주는 감흥들도 아마 거기에 빚지고 있을 것이다.
그 노래는 한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사람이 어쨌거나 자신의 속마음을 음악이라는 형식속에 숨겨 내지를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자리가 그런 희생과 죄의식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없는 공간이었을지라도, 결국 예술은 그런 자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거 같다.
르윈이 해도해도 너무 안되는 쳇바퀴 같은 인생을 돌다가 비로소 그 초라한 자리에 않았을 때, 어느 누구의 비평도 환호도 냉소도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그 작은 무대의 영토만큼, 르윈은 자신의 삶을 걸고 자신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낸다.
끝도없이 반복되는 삶의 어쩔 수 없는 비참함과 그럼에도불구하고, 그 축축하고 무거운 짐의 그림자 때문에 아름다운 어떤 순간들을 등가시키고 있는 이 영화가 이후에도 계속 생각나게 될 것 같다.
인생이 때론 끝없이 미안해질 일들을 만들기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미안함을 품는 것이 인간이 그나마 가질 수 있는 윤리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쉽게 털어버릴 수 없는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가끔 어떤 영화들은 그런 장면들을 삶 속에 스윽 들이밀 때가 있다.
이번 코엔형제의 영화는 그런 삶을 쉽게 연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색하지도 않으면서, 가볍지만 묘하게 묵직한 농담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지나가는 오래된 친구 같은 작품이다.
아무 희망이 없어도, 왠지 노래할 힘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