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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Jun 02. 2021

어쩌면 끝없이 이별하는 삶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대부분의 영화들을 다 좋아한다. 예전에는 공모에 내보려고 이 감독과 관련된 긴 글도 여러 번 썼는데, 대부분의 영화를 3번 이상씩 봤는데도 이상하게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번 보면 볼수록 신기하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을 계속 발견하게 돼서 신기했다. 


워낙 편집이 좋다. 음악과 장면이 연결되는 어떤 장면들은 두손 두발 다 들 정도로 절묘하고 정확해서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동요시키고 만다.      


그런 면에서 영화 <마스터>는 눈에 띄게 화려한 편집을 자랑하지도 않고, 그의 다른 영화들과도 비교해도 감정적으로 쉽게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꽤 어려운 이야기였다. 프레리란 인물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알콜중독자에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과 행동을 하는 그에게 감정이입 돼 영화를 보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오히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땐, 프레리가 아닌 랭카스터에게 감정이입 되어, 마지막 그가 노래 부르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많이 남기까지 했다.     


당연히 영화를 딱 한 번만 보고는, 거기 나왔던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프레리로 분한 호아킨 피닉스의 앙상한 육체와 공허한 눈동자가 나와 상관있는 일들로 느껴질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 긴 글을 쓰려고 <마스터>를 집에서 여러 번 돌려보면서 설명할 수 없는 허무하고 씁쓸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문득 외로워질 때면 프레리의 앙상한 육체와 표정이 떠올랐다. 프레리가 온전치 못한 황폐한 정신으로 어떻게든 공동체 안에서 살아내려는 고투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매우 특별해 보이지만, 결국 프레리의 이야기도 근본적인 성장담 이다. 결코 뭔가 더 나아지지 못하는 성장담 말이다. 얼핏 프레리가 '코즈' 라는 공동체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특별해 보이지만, 우리 모두 어떤 식이 되었든 살면서 특정한 공동체에 들어가게 된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서라도, 혹은 외로워서라도, 나를 묶어줄 공동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안에 속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자신에 대한 기만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완벽한 공동체나 교리는 불가능하다.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쪽 눈을 감고 있거나, 어떤 한계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확신’이라고 믿는 것은 어떤 한계를 정해놓고 거기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계속 걷고 있을 땐, 중간에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마스터>에서 랭카스터는 프레리를 길들이기 위해 방안을 계속 왔다 갔다 하는 훈련을 시킨다.     


프레리는 랭카스터의 프로세스를 통해 그가 평생토록 가장 그리워했던 순수의 시간을 꿈결처럼 맛보게 된다. 그것이 처음 프레리가 랭카스터에게 매료되었던 이유였을 텐데, 그 후 프레리가 계속 '코즈'에 남아있던 이유는, 그것이 철학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던 일정한 안정감에서 떨어져나온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이건 여전히 내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가장 두려운 건,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드러난 진실이 아니다. 진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거짓말로 지어진 집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떨어져 나왔을 때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러나 안정된 그 집에서 나와야 하는 순간이 삶에 꼭 한 번쯤 찾아오기 마련이다. 랭카스터는 평야에서도 가상의 점을 찍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지만, 프레리는 한계 없이 펼쳐진 평야를 끝까지 달려가고야 마는 인물이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한계를 넘어간다. 지평선은 끝이 아니고,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그 가상의 점을 넘는 순간, 그나마 자신이 애써 외면하던 현실의 윤곽이 드러난다. 환상은 다시 자신의 위치를 찾아 돌아간다. 어느 것에도 기댈 곳이라곤 없다. 프레리는 다시 처음처럼 혼자 길을 걷고 있는데, 그 모습이 담담해서 오히려 더 슬프다.     


인간은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지만, 평생토록 자신을 매어놓고 가둬 놓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닌다. 그게 어떤 공동체가 되었든, 종교가 되었든, 신념이 되었든, 어떻게서든 자신을 붙들어 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혹은 사람은 결국 뭔가를 끝없이 붙잡고 살게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길목쯤에서는 반드시 마스터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삶이 닥치기 마련이다. 그때 우린 헐겁고 비루한 삶을 애써 벼르며 살아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마스터>는 그렇게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것들이 어느새 멀어져 가고 바래져 버린 풍경들을 보여준다. 내가 아끼며 두고 왔던 것들, 기대했던 것들이 결국 거기에 ‘이미 없다’는 것을 두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뒤에는 거대한 구멍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습관처럼 자리 잡게 된다. 이 영화 마지막에 프레리는 그 공허를 다른 뭔가로 대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들인다. 언제든 부서질지 모를 것들과 그 순간순간을 살아가면서, 바닷가 모래 여인 옆에 누워 처음으로 안식한다.     


그 안식을 나도 긍정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에게, 어떤 신념에, 어떤 공동체에 의지하지 않고도, 불안해하지 않고 하루분의 평안을 쓸어 담을 수 있을까.      


<마스터>를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나도 프레리처럼 그 시간을 지나왔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많은 시간과 생각을 나눴던 사람들을 더 이상 안 보게 되고, 몇 번의 눈물을 흘리며 내 전부가 담겨있다고 확신했던 신념들과 자연스레 이별하게 되었던 시간들이 나 자신조차 외면하려 했던 공허의 나날들이었다. 어느덧 그 시간들과 거리를 두면서, 결국 그 모든 것들이 누구의 잘못도, 특정한 사람이 전적으로 책임질 일도, 내가 죄인처럼 숨어있을 일도 아니었다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깨닫게 되었다.  


때로 어떤 일들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거나 평행우주를 만들지라도 다시 원상 복구되지 않을 것만 같다. 아마 인생에서 몇 번쯤은 더, 프레리가 누워있던 바닷가에 멍하니 서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그 시간이 내게 파도처럼 들이닥칠 때,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그 공허함이 발라드나 락 음악에 격렬하게 증폭되어 흔들리지 않게, 설렁설렁 봄바람 같은 재즈 음악이, 한 겨울 솜이불 속처럼 푸근한 옛 포크송이 배경음악으로라도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영화 '마스터' 스틸컷
영화 마스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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