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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Jun 03. 2021

우린 어떻게 될까

영화 '비기너스'를 보고

 영화 <비기너스>는 창가에 놓인 하얀 꽃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정적 속에 텅 빈 공간이 한 컷씩 지나가고 나면, 한 남자가 화려하게 프린팅 된 옷을 꺼내 박스에 정리하고 있다.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 껍데기만 고스란히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 것처럼, 아버지의 짐들을 정리하면서도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의 마음은 여전히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아버지가 키우던 강아지 아서와 똑같이 그 역시 낯선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아이처럼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아서는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올리버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상대이다. 이 영화는 소중했던 사람을 잃게 된 후, 아들과 반려견이 애도의 시간을 지나가는 과정들을 쓸쓸하고 관조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격정적인 감정과 눈물 없이도, 한 사람의 죽음이 남은 이들에게 남기고 간 황량하고 메마른 삶의 정서가 이완 맥그리거와 강아지의 내향적인 몸짓과 눈빛에 녹아있다. 어떤 자극에도 무감각해진 것처럼 올리버는 내부로 깊이 침잠하지만, 삶의 우연성은 예측도 할 수 없었던 특별한 인연으로 생에 다시 새로운 자극을 가져다준다. 애도의 시간과 사랑의 시작이 겹치면서 그렇게 또 다른 삶의 무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영화 '비기너스' 스틸컷

슬픈 눈으로 파티에 와 있던 올리버는 말없이 다가오는 애나의 호의에 조금씩 끌리기 시작한다. 굳게 닫힌 어두운 옷장 속에 숨어 쉽게 나올 거 같지 않았던 소년의 마음에도 저녁 햇살이 비쳐오고, 어느덧 부서질까 아깝게 다가오는 사랑의 순간들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올리버의 자질구레한 일상 속에는 여전히 아버지와 나누던 사소한 추억들이 출몰한다. 평범한 사물과 소리, 풍경에도 아버지의 삶은 지금 이곳에 온전히 되살아나 버린다. 파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눈앞에 보이는 잡지 한 권, 연인과 나누는 키스 속에서도 아버지가 흥얼거리던 전화기속 음성이, 노트북 앞에서 짓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아이처럼 팔짝거리며 춤추던 모습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75세에 커밍아웃을 하고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할’의 삶은 이제 겨우 서른 중반에 불과한 올리버의 삶보다 훨씬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쳤다. 내성적이고 사려 깊은 올리브는 그의 몸과 기억 구석구석에 깊이 베 있던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상념들을 떠올리고, 영화는 그런 올리브의 두서없는 마음을 에세이처럼 그려간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후에 불쑥 불쑥 삶에 파고드는 상실감을 <비기너스>는 올리버와 강아지 아서의 발걸음처럼 배려있고 조심스럽게 묘사한다. 현재의 공백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채로 그대로 남겨져 있지만, 할이 열정적으로 살다간 마지막 삶의 흔적들은 올리버의 현재와 조응하며 느리지만 깊이 있는 위로를 건넨다. 한 사람의 죽음은 거기서 그저 끝이 아니라,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든 다시 재생된다. 불꽃놀이에 환호하며, 꽃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침대에 누워서도 호스피스에게 작업을 걸던 할의 마지막 모습들은 올리버의 마음에도 작은 불꽃을 키워 낼 용기를 준다.


영화 속에서 할의 친구들이 하는 불꽃놀이는 한밤중이 아니라, 해가 지고 난 초저녁에 이루어진다. 밤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른 저녁에 하게 되는 불꽃놀이는 생의 시간이 다해가는 할이 지금 당장 소진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을 의미할 것이다. ‘영원토록’ 과 ‘평생’의 잣대로 사랑을 재고 망설일 만큼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다. 불꽃놀이 화약을 고이 모셔두고 새까만 밤을 기다리다 어느덧 해가 떠버리고 후회해야 그 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어쩌면 인생이란 애초에 불꽃놀이처럼 마음껏 낭비해 버려야했던 게 아닐까. 우리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사랑과 행복을 확신하게 만드는 더 많은 증거가 아니라, 순간순간 그것들을 그 자체로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불안한 눈빛은 그대로 나의 눈빛에도 어려 있다. 그 불안을 마주보며 견뎌내긴 어렵지만, 주변을 스치는 사소한 기쁨들은 때론 모든 시름들을 덧없게 만들어 버린다. 지속되지 않지만, 순간을 생생히 살아내는 것들은 어떤 것보다 아름답다. 누군가를 위한 들꽃 한 다발, 통통한 초록색 애벌레처럼, 그것들은 영화 속 대사처럼 가장 간단한 것이지만 순간을 행복하게 만든다. 아마도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들어 버릴 것을, 죽어갈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반짝이는 모든 것들은 불안에 여유로운 미소를 보낸다. '이젠 어쩌지‘, ‘우린 어떻게 될까’ 라는 물음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체온이 깃든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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