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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Jun 05. 2021

우주에 점과 점 하나가 만나

영화 '그래비티'를 보고

어렸을 적에는 손바닥만한 크기라도 과학잡지책에 나온 우주 사진을 보고 있으면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비행기조차 타본 적 없었던 당시, 지구 밖을 상상하는 것조차 아득한데도 그 이상한 공간이 너무 궁금했다. 중력이 없는 공간에 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별들은 어떻게 빛날까 등 등...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쯤이면 우주여행 정도는 여행 패키지 종류로 나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우주는 낯설고 신비롭다. 그런데 영화 <그래비티>를 3D로 보면서 우주에 떠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원 없이 느껴볼 수 있었다. 과학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지구를 바라보면서 허공에 붕붕 떠서 우주망원경 수리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 속에 나온다. 주인공은 단 두 명이고, 영화는 시종일관 이들의 체감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영화 '그래비티' 스틸컷

까만 배경 속 촘촘히 박힌 별들 속에 둘러싸인 우주는 맑고 아름답고, 몸은 불면 날아갈 듯 가볍다. 

통신으로만 진행되는 이어폰 속 가벼운 대화들만이 떠다니는 우주에는 조지 쿨루니의 목소리처럼 어떤 얽매임도 비루함도 없는 쿨한 자유로움만 부유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긴 후, 영화는 그 무한한 우주를 신비로움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공간으로 바꾸어버린다. 끝도 없이 펼쳐진 공간에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 어떤 상태일지 끔찍하리만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거꾸로 그 끝도 없는 무한한 공간에서 누군가와 접속되어 있다는 아주 작은 사실 하나가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간절하게 체험케 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계속 말을 걸던 무덤덤하던 매트와 다르게 무덤덤하게 일만 하던 라이언은 인공위성 파편에 멀리 날아가 혼자 남겨져 통신조차 두절된 후, 마치 죽음으로 넘어가는 듯한 상태를 경험한다. 암흑과 정적의 상태에서 자신의 목소리만 몇억 년의 시간처럼 길게 숨 막힐 듯 울리고 있다가 비로소 희미하게 불빛이 나타나고 매트의 수다가 이어지는 순간, 그 길고 지루하던 매트의 말들이 그처럼 아름답게 들릴 수가 없다.  


영화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한한 공간에 하얀 우주복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이 끈으로 연결된 이미지가 묘하게 사람을 안심하게 만든다. 연료도 떨어져 가고, 산소도 1%밖에 안 남았지만,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어떤 사실보다 간절히 삶에 희망을 걸게 만든다. 산소가 모자라도 허공에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농담과 단 한마디 목소리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가 두 팔에 힘을 불끈 쥐게 만든다.  


대부분의 장면을 중력이 없는 곳을 묘사한 이 영화의 제목이 왜 '그래비티' 일까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면 그보다 더 적합한 제목이 없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지구에 있을 땐 딸의 죽음 이후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무기력하게 삶을 떠다니던 라이언은 아이러니하게도 중력 자체가 없는 우주에 홀로 떠다니다가 강렬하게 삶을 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가 아무 거칠 것도 방해할 것도 없던 공간을 고독하게 떠다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다로 떨어져, 대지에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관객들도 고스란히 그 중력의 무게를 체감하고야 만다. 

라이언의 살아야겠다는 고백은 단지 이미지만이 아니라 시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무게의 감각으로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1시간 30분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우주공간 3D 이미지들이 마치 그 장면을 온전히 체감하기 위해서 존재했었을 것만 같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우리 삶을 내리 누루고 있는 중력의 무게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지구 밖 우주에 떠다니며 맡은 임무만 성실히 수행하다 보면, 땅에서 자신을 내리누르던 고통과 상처들은 마치 나와 아무 상관없던 일처럼 느껴지게도 할 것이다. 이제 그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나를 체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딸의 죽음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자동차 안에서 보냈다는 라이언이 우주에서 일을 하게 된 이유도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의도가 컸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얽매이게 하는 그 어떤 접촉도 부대낌도 없는 공간에 홀로 떠 있게 된 라이언은 그것이 비록 고통이나 아픔을 동반했을지라도, 땅 위에 두발을 딛고 살아내게 만들던 '삶 자체의 가치'를 보게된다.  

눈물조차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떠다닐 수밖에 없는 우주공간에서 라이언은 혼자가 돼 버린다. 

그토록 살기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주파수 소음 속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자장가 소리는 그녀에게 죽은 딸을 생각나게 하면서 삶에 대한 모든 미련도 거둬 버린다. 철저히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더 이상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어렵지 않게 죽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목까지 차오른다.  

그래서 라이언을 죽음 직전에서 꺼내 줄 수 있었던 환상은(매트가 나타나는 장면) 어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득보다 더 살아갈 이유에 대한 치열한 해명처럼 느껴졌다. 

나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고 삶을 살아내기에는 이 끝도 없는 우주에서 충분한 이유를 찾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지금 내 구조선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그 사람을 살려야 하고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내야 한다.

그때 삶은 어찌 되었건 손에서 쉽게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 1%의 확률을 붙잡고서라도 어쨌든 전부를 걸고라도 던져야 하는 것이다.  

희박한 가능성의 문을 열고 도착한 이 곳은 납을 짊어진 것처럼 온몸을 무겁게 누르는 중력이 어디나 존재하는 지구다. 

그 중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라이언은 힘겹게 일어난다.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결국 나를 짓누르는 고통이나 아픔의 압력들을 힘겹게 온 몸으로 버텨내며 한발 한발 내딛는 과정일 것이다. 

사람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살아가는 한, 사랑하고 마음 쓰는 것들이 존재하는 한 그 중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살게 하는 것 또한 동일하게 그렇게 나를 땅에 붙잡아 놓게 되는 것들 때문이다. 

쓸데없는 농담과 어떤 목소리에 서로 기대어 지금 이 순간이 유지되는지도 모르겠다. 

전파 속 누군가의 목소리나 문 두드리는 소리를 기다리게 되는 그 마음 하나로도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된다면 어쩌겠는가. 

그게 인간이고,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많이 울고 상처 입으면서도 어느새 다시 빨래를 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밥을 먹으면서, 살고 있다면 말이다. 

영화 그래비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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