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했다. 피아노 연습을 레슨 시간까지 합쳐서 3시간 하고 돌아온 뒤였다. 이상했다. 원래 피아노 학원 다녀오면 충전되는 기분이어야 하는데? 기분이 좋아지고 에너지가 샘솟아야 하는데?
이유를 생각해 봤다. 역시 성취에 대한 나의 조급함과 완벽주의가 문제였다. 연습을 거의 매일 가면서 열심히 했는데, 레슨을 받고 나서 시무룩해진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분명 선생님과 즐겁게 대화도 하고 칭찬(심지어 박수도)도 그만큼 많이 받았는데도 앞으로 더 연습해야 할 부분이 늘어난 것에 기운이 빠진 것이었다. '다음 레슨까지 만들어 가야 할 부분 왜 이렇게 많냐?? 이거 또 언제 다 연습해!' 갑자기 지치고 우울해져서 주 3회 가기로 하고 예약해 뒀던 필라테스를 빠져버렸다. 그리고 그냥 쉬었다. 좋아하는 콘텐츠를 보면서 말이다.
힘들 땐 그냥 쉬자
다음 날이 되어 일어났을 땐 훨씬 기분이 괜찮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피아노 레슨,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과제가 주어졌다는 것은, 이전 과제를 잘 해냈다는 방증이었다. 또 과제가 이전보다 훨씬 많이 주어졌다는 것, 그것도 내가 주어진 과제를 잘 소화해 내니까, 내가 소화해 내는 만큼 과제를 내주신 거다. 그리고 기초 연습 추가 된 거, 이거 극P러 너가 원하던 거였잖아? 지루한 기초부터 해나가는 거 말고, 좋아하는 곡 연습하면서 필요한 부분 기초 연습 병행하는 거! 어제 왜 그렇게 우울해한 거야? 역시 잘 쉬고 일어나면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회복도 빠른 나. 칭찬해.
이것뿐 아니라, 생각해 보면 요즘 스트레스가 누적된 것 같았다. 식단 관리에 대한 압박, 더불어 이것저것 다 잘 해내야 하고, 빨리 이루어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늘 이런 상태로 나를 내몬다. 스스로를 행복하게,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건 늘 뒷전이 된다.
어제 계획했던 운동을 빠지는 일탈(?)을 하고 다음 날 조금은 나아진 기분을 느끼면서, 이전에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그로 인한 끌림까지 줬던 한 ESTP 유튜버의 발언을 떠올렸다. mbti가 나(INFP)와는 상극인 그 유튜버가 자신의 라이브 방송에서, 밤에 치킨을 먹으며 한 얘기였다. 먹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던 도중이었다(먹방 유튜버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연애 유튜버이다). 운동이랑 식단 관리까지 엄청 빡세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긴 그렇게 못한다고, "그건 내 능력 밖이야"라고너무나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거다.그러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를 덧붙였던 것 같다. 이 한 마디가 내 머리에 꽂혀버렸다. 자신의 주관, 소신이 뚜렷하게 드러난 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