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벚꽃 놀이
고등학생 시절 교문 앞에 있는 벚꽃나무와 그 너머 밤 9시 30분이 되지 않으면 결코 넘어갈 수 없었던 땅덩어리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꼭 벚꽃 구경을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기 자유와 자연은 나에겐 너무 멀고 아름다운 무엇이었다. 해 뜨기 전에 학교에 와서 해가 한참 떨어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그 보편적인 불행의 시기. 아주 긴 시간이 흘러 그 결심을 실현하게 되었다.
#1일차. 경화역, 여좌천, 생태공원
차로 거의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진해. 날이 계속 따뜻하여 벚꽃이 벌써 다 떨어졌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내가 방문했던 목요일은 벚꽃이 온전하게 만개해 있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경화역. 도시에 들어왔을 때부터 거의 모든 가로수가 벚꽃나무라 하얀색 벚꽃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젠 쓰이지 않는 기차 선로 양옆으로 크고 굵은 벚나무들이 늘어선 경화역 공원은 그야말로 벚꽃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인파도 상당했으나 인도가 넓은 편이라 다니기도 수월했고,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기차는 색이 바랜 곳 없이 반짝반짝했다. 사실 여행 내내 대기 질이 탁하고 하늘이 뿌얬는데 그나마 경화역에서 만난 하늘 빛이 괜찮았다.
진해에서 만난 벚나무들은 정말 꽃이 풍성하고 하단부의 뿌리가 굵으며, 잔가지가 흐드러지게 뻗어 있어 정수리 근처까지 내려온 가지를 살짝 끌어당겨 사진을 찍기에 좋다. 벚나무야 사실 곳곳에 있고 근처 개천가만 가도 볼 수 있지만 사람에게 가지를 뻗을 정도의 벚꽃나무는 진해에서 처음 봤다. 날씨가 계속 건조했기 때문인지 그토록 많은 꽃이 있음에도 공기에 꽃향기가 섞여 있지는 않았지만 보는 즐거움만큼은 분명했다. 간간이 동백꽃도 보였다.
푸드 트럭 등이 아직 늘어서지 않은 기간이라 주변에서 점심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명하다는 라멘집에서 40~50분을 기다려 겨우 끼니를 때웠는데, 맛이 없는 건 아니었고 차슈가 상당히 부드러웠으나 그토록 오랜 시간을 들여서 먹을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축제 기간이라 이런 불편함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참고로 경화역 공원 근처에는 안민고개라는 곳이 있는데 공원에서 올려다보면 벚꽃나무가 높은 곳에서 구불구불하게 서 있는 게 눈에 띈다. 처음에는 어떤 산인 줄 알고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이리저리 물어봤는데 알고 보니 고갯길이더라. 군항제 기간에는 차량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고 근처 주차장은 워낙 좁았기에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여건이 된다면 구경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그다음 여좌천 쪽으로 넘어갔는데 이곳은 더더욱 주차하기가 까다로웠으며 엄청난 굵기를 자랑하는 벚나무들이 통로에 심심찮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야 했다. 먹을거리를 비롯해서 여러 행사 부스는 여좌천에 훨씬 많기는 했다. 여좌천 하면 떠오르는 로망스 다리는 오래된 드라마 촬영지일 뿐 여좌천에 있는 다른 다리들과 구별되는 특징은 없었다. 참고로 이번에는 밤에 불빛이 들어오도록 몇 가지 구조물을 설치해 두었는데 여좌천 전체를 아우르고 있지는 않은 데다 생각보다 화려하지도 않으므로 굳이 불이 켜지는 6시 30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느껴졌다.
참고로 여좌천에서 조금 벗어나면 일반 주택가인데 역시 가로수가 모두 벚나무인 데다 간간이 귀여운 벽화가 있어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주택가는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여좌천을 돌아다닐 때 조금 높은 곳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어 의아했는데 지도를 보니 위쪽에 생태 공원이 있었다. 공원은 언제나 환영인 고로 다리를 좀 더 움직여 가보았다. 현재 여좌천의 물은 거의 말라 있는 상태인 반면 생태 공원의 호수는 그래도 보기 만족스러울 만큼의 수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곳곳에 나무를 깎아 만든 새 모형이 많았는데 정말 귀엽고 정교했다. 그리고 여기에도 벚나무가 있다. 진해는 그야말로 벚꽃 천국이다.
#2일차. 해군기지사령부, 해군사관학교, 중원로터리, 블랙이글스 에어쇼
대충 3년치 벚꽃을 가득 눈에 담은 뒤, 창원에서 하룻밤을 묵고 진해로 돌아왔다. 참고로 나는 토요코인 창원 호텔을 예약했는데, 3명의 가족이 따로 잘 수 있는 1인용 침대 3개가 놓인 방이 있다는 점과 무료 조식은 좋은 포인트였으나 투숙객임에도 불구하고 주차장 이용은 선착순이라는 점이 상당한 마이너스였다. 근처 공영 주차장은 유료이며 그곳 역시 자리가 없을 수 있고, 호텔에서 주차비를 지원해주지도 않는다. 체크인을 부리나케 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다른 숙소를 고려해볼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호텔 투숙객이 호텔의 주차장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게 큰 충격이었다(...)
아무튼, 2일차의 진해는 All about military! 라는 느낌으로 구성되었다. 진해 군항제는 평상시에는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는 해군의 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다. 그런데 아무래도 군 시설이다보니 내비게이션으로 찾아가는 게 만만치 않다. 해군사관학교의 경우 그나마 주소지를 찾을 수 있지만 해군기지사령부는 그게 안 된다. 근처에 '해군의집'이라는 시설이 있으니 그걸 참고하거나,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마주치게 되는 임시 표지판을 잘 읽을 것! 두 곳 모두 입구에 군사경찰이 배치되어 있지만 친절하게 들어가시라고 손짓을 취해준다.
해군기지사령부는 정말 놀랍도록 넓고 조용했다. 차를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았던 데다 딱 보니 도보로 돌아다닐 만한 엄두가 나지 않아서 슬쩍 회차점을 돌고 그냥 나와버리긴 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벚꽃이 가득했으며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인원들이 약간의 엄숙함을 선사했으나 얼핏 보이는 이런저런 시설들에 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기지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는 무척 가까워서 같이 돌아디니기에 좋다. 멋들어진 입구를 지나 주차장을 찾아 쭉쭉 달려보려 하니 유니폼을 입은 내부인들이 간간이 안내를 해주었다. 나는 분명 사관학교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냅다 부둣가가 나와서 놀랐는데 그곳에서 군함 개방 행사가 열리고 있었으며 몇 가지 부스를 차려놓고 관광객 맞이를 하고 있었다. 이번 2023년 군항제 기준으로 이틀마다 공개하는 군함이 달랐으며 내가 간 금요일에는 원산함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전날인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공개된 군함이 없었으니 운이 좋았다.
원산함은 기뢰부설함(즉 물속에 폭탄을 설치하는 배)이라고 하며 헬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갑판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곳에 올라가봤지! ^^< 배에 달려 있는 핀 하나하나도 묵직하고 거대했으며 다른 배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을 시설들이 존재했다. 물론 들어갈 수는 없었고 어디까지나 군함의 외부를 한 바퀴 도는 정도만 가능한 데다 사진 촬영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렇지만 민간인으로서 언제 그런 시설을 둘러볼 수 있겠나 싶었다.
근처에는 UDT/SEAL 부스가 있어 저격총을 만져볼 수 있었다. 총에 달려 있는 스코프가 내 안경보다 더 선명한 시야를 제공하는 듯했고 손목이 부실한 편인 내가 다루기에는 손잡이 하나하나 무거웠다. 받침대가 분명히 있는데도 이걸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조금 쩔쩔맸다. 잠수 구조대원의 군복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곳, 체력장 같은 과제 도전으로 기념품을 얻을 수 있는 부스도 있었다.
또 이번 군항제에서는 중원로터리에서 자주포와 전차를 전시했다. 각각 K2 전차와 K9 자주포라는데, 벚꽃이 가득하고 건너편에 어린이집 간판이 있는 곳에 엄청난 크기의 군 무기가 있는 광경이 대단히 어색해 보였지만ㅋㅋㅋㅋ 그만큼 신기한 느낌도 있었다. 그곳에 늘어선 푸드코트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웠다.
그리고 내심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했던 블랙 이글스의 에어쇼 공연을 볼 시간이 찾아왔다. 입장을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었고 햇빛이 너무나 뜨거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박이었다. 맙소사! 나는 에어쇼를 본 게 처음이어서 그야말로 신문물을 접한 사람처럼 감탄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8대의 전투기가 한 편대를 이룬 블랙 이글스 팀은 20분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곡예 비행을 선보였다. 설명을 해주시는 소위님이 이런이런 대형이라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하트나 태극무늬, 무지개를 그리는 것처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비행부터 시작하여 저속비행, 아슬아슬한 근접 비행, 태양보다 더 높이 떠오르는 비행, 급강하를 비롯한 놀라운 각도를 선보이기에 이르기까지 저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에어쇼가 아니라 거의 전투기 서커스다. 저게 돼? 세상에! 예쁘다! 대박! 으아아악! 대형을 보여주기 직전의 무전 소리마저 듣기에 멋있었다.
일정 자체는 1박 2일로 짧았지만 하루마다 분명한 테마와 즐길거리가 있어 만족스러웠다. 일차적인 목적이었던 벚꽃 이외에도 챙긴 추억들이 많았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집중적인 현존이다. 이렇게 나는 다시 일상을 꾸릴 기운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