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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드 Apr 10. 2023

직업의 선택에 관한 젊은이의 고찰

1835년 8월 10일과 16일 사이, 칼 마르크스 작성

REFLECTIONS OF A YOUNG MAN ON THE CHOICE OF A PROFESSION

Written by. Karl Marx


First published in the yearly Archiv für die Geschichte des Sozalismas und der Arbeiterbewegung, Ed. K. Grünberg, Leipzig, 1925


  * 이 글은 번역문입니다. 오역은 당연히 있을 수 있으며, 작성자의 개인적인 이해를 위한 의역이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대자연은 동물이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행동의 영역을 정해 놓았다. 동물은 그 안에서 평화롭게 움직이며 그 영역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하지도, 심지어 다른 생명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존재한다. 신은 인간에게도 인류와 인간 자신을 고귀하게 만들라는 보편적인 목표의식을 주었으나, 그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수단을 추구하는 일은 인간에게 맡겼다. 즉 신은 사회에서 인간 개인에게 가장 잘 맞고, 그가 자기 자신과 사회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자리position를 스스로 선택하게 했다.



  이러한 선택권은 다른 생명들에 비해 인간에게만 주어진 거대한 특권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개인의 모든 계획을 방해하며 개인이 불행해지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선택권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운에 맡기고 싶지 않은 젊은이가 가장 먼저 수행해야 할 의무일 것이다. 모두가 목표에 관해 저마다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목표는 개인에게 위대해 보인다. 무엇보다 깊은 확신이 차올라 내면의 목소리가 그 확신을 선언하게 되면 어떤 목표는 실제로 위대해진다. 신은 결코 어떠한 인도 없이 필멸자를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부드럽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쉽게 가라앉을 수도 있으며 우리 영감의 원천은 순간의 산물에 불과하여 또 다른 순간이 그것을 파괴할 수도 있다. 아마 우리의 상상력은 흥분한 우리의 감정이나 우리의 눈앞을 스치는 유령일지 모른다. 우리는 성급한 본능이 가리키는 곳을 신이 우리에게 점지해 준 곳이라고 믿고 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곧 우리를 몰아내고,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폐허 속에 놓인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직업 선택에 있어서 정말로 영감을 받은 부분이 있는지, 내면의 목소리가 그것을 허락했는지, 혹은 그 영감이라는 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고 신에게 받은 부름이 사실은 자기기만이 아니었는지 심각하게 살펴봐야만 한다. 하지만 영감의 원천 그 자체를 추적하는 방법 외에, 어떻게 그런 걸 알아낼 수 있을까?



  위대한 것은 빛을 낸다. 그 빛은 야망을 불러일으키며 야망은 쉽게 영감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이성은 야망이라는 악마에 이끌린 인간을 더는 제지하지 못할 수 있고, 그러면 그는 성급한 본능이 가리키는 곳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삶에 있어 자신의 자리를 선택할 수 없고 운과 환상에 휘둘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빛나는 기회를 제공할 자리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지도 못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도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으며 열정과 열의가 차게 식고 꺾이도록 두지 않는 자리에 갈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고, 생각은 만족되지 않으며 우리가 신을 비난하고 인류를 저주하게 만들 무언가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특정 직업에 관한 갑작스러운 열정을 샘솟게 하는 게 야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상 속에서 어떤 걸 인생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라고 미화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걸 분석해 보거나 그것이 가진 전체적인 부담감, 우리에게 부여되는 위대한 책임을 고려하지 않고 멀리서 엿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먼 곳에서 본 이미지는 사람을 속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이성은 여기에서 조언을 주지 못한다. 이성이 깊은 관찰이나 경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감정에 속고 환상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 이성이 우리를 저버린 이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부모님은 이미 인생의 길을 다 둘러보시고 가혹한 운명을 경험하셨다. 



  이 가운데 그래도 열정이 우리를 계속 부추긴다면, 냉철한 자세로 그것을 뜯어보고 그 일에 따라오는 무게를 인식하면서 그것이 가진 어려움을 알게 된 이후에도 우리가 어떤 직업에 관한 부름을 받았으며 그 직업을 계속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 후 열정은 우리를 속이지 않을 것이며 지나친 성급함도 우리를 흥분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믿는 자리를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사회관계는 우리가 그것을 결정할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어느 정도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 그 자체가 종종 위협적인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누구도 그런 현상을 비웃을 처지는 되지 못한다. 우리가 육체를 넘어설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면 우리의 몰락은 가속화될 뿐이다. 우리는 허물어지는 폐허에 무언가를 세우려 애쓰는 꼴이 될 뿐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정신과 육체의 법칙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행한 싸움이 되고 만다. 자신의 안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들을 화해시키지 못하는 자, 그가 어떻게 삶의 거센 압박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훌륭하고 위대한 행동은 침착함으로부터 비롯되고 침착함만이 잘 익은 결실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토양인데 말이다. 



  사람은 오래 일할 수 없고, 직업과 맞지 않는 육체 때문에 기뻐할 일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위해 삶을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과 약하지만 힘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든다. 그러나 우리가 재능이 없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우리의 재능을 가치 있게 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곧 부끄러워하며 무능력함을 깨닫고 다른 이에게 우리가 쓸모없는 존재라면서 가진 소명을 실현할 수 없는 사회의 일원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경멸하는 마음self-contempt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우며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감정이 있을까? 자신을 향한 경멸은 누군가의 가슴을 갉아먹고, 심장에서 생명력 가득한 피를 빨아먹으며 그 피에 혐오와 절망이라는 독을 섞어버리는 뱀과 같다. 우리가 직업에 관한 재능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환상이 하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복수하게 되는 잘못을 경계해야 한다. 세상이 질책하는 바와 맞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를 향한 복수는 그러한 질책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고려했고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직업이든 선택할 수 있는 상태라면, 아마 우리는 가장 좋은 가치를 줄 직업을 고를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확신하는 진리에 기반한 것이며 가장 넓게 인류를 위한 직업의 범위를 제공해 줄 무엇, 모든 직업은 그저 수단이며 인간의 완성이라는 보편적인 목표 의식에 우리를 더 가까이 두게 하는 것을.



  가치는 무엇보다 개인을 드높이며 개인의 모든 행동과 노력에 고귀함을 더한다. 가치는 개인을 강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의 존경을 불러온다. 하지만 우리가 노예 같은 도구가 아니고, 우리의 영역 안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라는 가치는 오직 직업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 부끄러운 일을 요구하지 않는 직업에 의해서만, 설령 겉으로는 부끄러워 보인다 해도 고귀한 자부심으로 최고의 이들이 따를 수 있는 직업에 의해서만 말이다. 이것을 가장 위대한 수준으로 보장하는 직업이 언제나 최고의 지위는 아니겠지만 늘 모두에게 선호될 직업이다. 하지만 어떤 가치도 보장하지 않는 직업이 우리의 가치를 떨어뜨릴 때, 우리는 나중에야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는 생각에 기반한 부담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의지를 잃고 자기기만만이 존재하게 되며, 자신을 배신하면서 얻은 구원은 절박하기만 할 따름이다.



  추상적인 진실과 관련된 삶 그 자체와 그다지 밀접하지 않은 직업은, 아직 본인의 원칙이 확고하지 않으며 신념이 강하고 단단하게 세워지지 않은 젊은이에게 가장 위험하다. 동시에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 만연한 생각을 위한 노력과 삶을 우리가 희생하게 된다면 그 직업은 가장 귀해 보일지 모른다. 그런 직업은 그 일에 소명을 가진 이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충동에 넘어가 생각 없이 성급하게 직업을 선택한 이를 파멸하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직업에 관해 우리가 가진 존경심은 사회에서 우리의 지위를 높여주고, 우리의 가치를 강화하며 우리의 행동이 도전받지 않도록 한다. 자신이 높게 쳐주는 직업을 선택한 이는 그 직업이 쓸모가 없어질 거라는 생각에 진저리를 칠 테고, 사회에서 그의 직업이 고귀한 것이어야만 고귀한 행동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첫 번째 지침은 우리 자신의 완성과 인류의 행복이다. 이 두 가지가 충돌할 수 있다, 한쪽이 다른 쪽을 무너뜨리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인간은 다른 사람과 선의 완성을 위한 일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의 완성을 얻을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서만 일을 한다면 그는 배움이 깊은 자, 위대한 현재, 훌륭한 시인으로 유명해질지는 몰라도 완성된 인간,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역사는 공익을 위해 일하여 자신의 품격을 높인 사람들을 위대하다고 칭한다. 수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건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는 우리 모두가 따라 하려고 하는 존재가 인류를 위해 희생했다고 가르친다. 누가 이런 사실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면서 무엇보다 인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한다면 어떠한 짐을 짊어지게 되어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짐이 모두의 이익을 위한 희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옹졸하고 한정적이며 이기적인 기쁨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행복은 수많은 사람에게 속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행동은 조용하지만 영원히 작용하며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고 난 뒤의 잿더미 위로는 고귀한 사람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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