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다른 지평선의 중요성
생각보다 일찍 휴식이 끝났다. 당장 먼 곳으로 해외 여행을 갈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이 마지막 휴식을 괜찮게 장식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침 아빠가 고창의 유명한 청보리밭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다같이 짧게 다녀왔다.
'청보리밭 축제'라고는 하지만 장소 자체가 개인의 농장이라서 떠들썩한 지역 축제의 느낌은 들지 않았다. 카페와 식당 건물 하나, 소박한 규모의 먹거리 장터와 농산품 부스 몇 개, 그리고 한쪽에서 어떤 분이 기타를 치며 포크송 느낌의 노래를 불러주고 계셨다. 개인적으로 뜻밖이었던 점은 청보리밭만 있는 게 아니라 유채꽃밭도 절반쯤 되었다는 것. 이들을 다 수확하고 나면 가을에 해바라기와 메밀꽃밭이 된다고 한다.
그곳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자연스럽게 펼쳐진 하늘이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가 사는 동네도 일종의 아파트촌이라 방해 받지 않는 시야를 누릴 수는 없는데, 고창 청보리밭에선 이런 풍경이 가능하다.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흐렸던 날씨가 화창하게 갠 덕분이 크긴 했지만, 그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하늘과 땅이 맞물리는 모습은 시골이라고 해서 보기 쉽지는 않다.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볼 수 있는 온전한 자연은 새로웠고 귀했다.
나는 현대적인 것과 문화 시설 등을 중시하는 편이라 문명과 도시를 벗어나지는 못할 스타일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자연스러운 것, 특히 내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다른 지평선과 풍경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그런 사소한 다름은 내가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그 순간에 집중하게 한다. 그 다름은 내가 무심코 스쳐 지나갈 수 없게 만든다. 나의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마음을 챙기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 혹은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한 콘텐츠들에서는 '현존'을 키워드로 꼽는다. 지나갔기에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과거, 사람이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알 수 없고 정해지지도 않은 미래에 의식을 두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일에 힘쓰면 많은 심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의견에 동감하는 편이다. 지금의 나를 인식했을 때 사고는 안정을 되찾고,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서 겸손한 풍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자연이 움트는 곳을 여행하는 건 유효한 선택이다. 하늘은 매일매일 다르고 바람은 결코 같은 모양으로 내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만들지 않는다. 파도가 일으키는 물거품도 다 다르다.
온전한 저녁이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사는 한국인들은 의식적으로 현존을 행해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다. 긴 노동을 강요 받으며 순간의 충만한 나와 현실을 느끼기엔 어려운 탓이다. 우리가 평범한 일주일에서 느낄 수 있는 다름이란 보통 달갑지 않은 미세먼지의 농도, 맑거나 비가 오는 날씨, 오늘은 어쩐지 조금 탄 맛이 나는 것 같은 커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가게 정도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요소들로 현존을 끌어올리기란 참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여행, 특히 해외 여행을 가려고 하는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는 다들 아는 것이다. 내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느끼며 현재에 존재하는 가장 쉽고도 영향력 있는 방법이 바로 여행이라는 걸 말이다.
문득 일부 어리석고 닫힌 사고를 가진 자들이 여행을 돈이 많아서 놀러 나가는 사치 행위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