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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드 Oct 04. 2023

조용한 명절 가로수길에서 1박 2일 (1)

호텔 안테룸 서울 호캉스 후기

이른바 헬조선 불반도 근로자가 어지간해서는 누리기 힘든 6일간의 찬란한 연휴, 나는 비행기 티켓을 끊지 못한 대신 국내에서 소박한 일탈을 즐기기로 했다. 바로 호캉스. 같이 가준다는 사람이 없어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숙박료와 집에서 너무 멀지 않은 강남권을 염두에 두고 찾아보니 '호텔 안테룸 서울'이라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굳이 찾아가지 않는 가로수길 부근에 위치해 있고, 목-금 일정이면 10만 원 대로 예약할 수 있었으며 북카페 겸 루프탑 테라스 카페가 있었다. 이거다! 그렇게 처음으로 혼자 호캉스를 즐겨본 후기를 적어본다. 사진 찍는 재주가 없다는 점은 미리 양해 바란다.






나는 MBTI로 말하면 J형, 그러니까 계획형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대충 한 달 전쯤에 어디 어디를 가봐야겠다고 열심히 메모를 했다. 신사동 부근을 갈 길이 없어서 내게는 다 새로운지라 목록을 채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금요일이 추석 당일이기 때문에 그날은 갈 곳이 많지 않으리라고 대충 예상했다. 그러니까 대충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서 아침 겸 점심을 어디에서 먹고 조금 돌아다니다가 조카 육아하러 집에 들어가야지, 대신 목요일에는 갈 곳이 꽤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은 완전 망했다!!


추석 당일에만 쉬거나 쭉 영업하는 곳도 있긴 했지만 연휴 전체를 쉰다든가 추석 전날과 당일까지 쉬는 곳이 훨씬 많았다. 가로수길 골목은 너무 조용했으며 내가 가보겠다고 적은 곳들은 하필 내가 가로수길에 머무르는 시간에 영업을 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며칠 전에 아예 가게 문을 닫은 경우도 있었다. 이럴 수가! ㅠㅠ 나의 메모지가 전혀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점심 무렵에 호텔 부근에 도착했고 체크인은 3시라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끼니는 챙겨야 하는 법. 일단 이리저리 걸어보기로 했다. 설마 밥 먹을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을까. 다행히 구원의 장소는 존재했다!


초이다이닝의 후토마끼 (사진은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문이 열려 있고 쌀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니 충분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연남동에서 꽤 이름 있는 가게인 '초이다이닝'에 들어가 커다란 후토마끼 5피스를 먹었다. 오이를 먹지 않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조오금 손해 보는 장사이긴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딱 디저트를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배를 채울 수 있었는데 말이다. 캐치테이블 번호판이 있는 거로 보아 가로수길에 있는 지점도 평소에는 사람들이 꽤 몰리는 모양인데 웨이팅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역시 명절은 서울에서 놀아야 제맛이다(?)


이후에 입가심을 할 음료를 마실 곳은 운 좋게 이미 봐둔 상태였다. 식당을 찾다가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가게를 먼저 발견한 덕분이었다. 동양풍 전등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어 그야말로 난데없이 운치 있는 곳이었다. '청수당갤러리'라는 곳이었다.


청수당갤러리의 입구


카페는 지하 1층, 1층,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층마다 분위기가 달랐다. 지하 1층에서는 약간 깊은 향기가 나면서 모래와 오브제들이 깔려 있었고 2층에서는 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여기저기 벗겨진 곳이라든가 콘센트를 꽂는 곳이 뽑힌 채 덮이지 않은 흔적을 보면 먼지가 피어오를 것 같아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그윽했고 각 층마다 분명한 자연 테마를 가지고 있었으며 설명이 붙어 있는 걸 보면 알게 곳곳에 예술 작품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쓰인 듯했다. 층마다 확실히 차별화된 점이 있어서 어디에 앉아야 하나 한참 고민한 끝에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청수당갤러리에서 시킨 음료


정오가 지나면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카페인 쇼크가 잘 온다) 스파클링 과일 주스 같은 것을 시켰다. 동양 테마를 확실하게 가져가는 곳이라 메뉴에는 스파클링이라고 친숙한 표현이 적혀 있었으나 주문을 받은 직원분은 스파클링이라는 말 대신 '청수'라고 하셨다. 맛은 '천혜향 청수'라는 메뉴명에 아주 충실한 맛으로 달달하고 상쾌했다. 사실 수플레 케이크도 먹어보고 싶었으나 혼자서 먹기엔 조금 클 것 같았고 무엇보다 가격이 상당했다^ㅠ^...


시원한 음료와 함께 적당히 더위를 식히고 나자 체크인 가능한 시간이 1시간 앞으로 다가와서 나는 내일 아침 메뉴를 사기로 했다. 본래 호텔 안테룸 서울은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베트남 식당에서 제공해 주는 조식으로 유명했는데 요새는 하지 않는 모양. 나는 아침은 꼭 먹어야 하는 스타일이라 내일이면 더욱 조용해질 가로수길에 대비해 식량을 마련해야 했다. 슥슥 카카오맵을 긁어 보는데 그릭요거트를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우연찮게 그 근처에는 내 친구가 극찬한 도넛 가게인 '올드페리도넛'도 있었다. 한 마디로 나는 요거트와 도넛을 사야겠다는 계시를 받은 셈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언급한 곳들은 내가 사전에 가봐야겠다고 적어둔 장소들이 아니었는데 하나같이 유명했다. 내가 방문했던 '유니드마이요거트'라는 곳도 마켓컬리 초기에 입점했을 정도로 사랑받는 가게였다. 확실히 서울에는 유명하고 맛있는 집이 많은 모양이다. 거기서 무가당 요거트 100g과 곁들여 먹을 코코넛 그래놀라를, '올드페리도넛'에서는 크렘 브륄레맛 도넛 하나를 샀다. 드디어 체크인을 할 수 있겠다!


유니드마이요거트의 무가당 그릭 요거트와 그래놀라



이 과정에서 나는 놀랍도록 아무런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A4 용지에 수평 모양으로 타임라인을 그려가며 계획을 짜기도 했던 인간이었는데, 문 여는 집이면 일단 찾아가 보자는 대책 없고 즉흥적인 마음가짐으로 돌아다녀도 답답하지 않았다. 해외여행에서 이랬다면 문제였을 테지만, 새삼 내가 나를 어떤 유형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실감했다.


아, 그랬다. 나도 P형처럼 돌아다녀도 괜찮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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