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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드 Oct 24. 2023

1. 일을 다 했으면 퇴근해야 한다는 말

할 일을 다 하고도 퇴근하지 못하는 어느 근로자의 고백


세전 80만 원을 받던 인턴직을 벗어나 주 9시간 근무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결코 일을 적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A4 10페이지 정도를 매일매일 번역했다. 당시 내가 일하던 팀에는 나와 거의 비슷한 일을 하는 동료 네 명이 있었는데, 해외 체류 경험도 상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늘 나만 가장 먼저 하루에 해야 할 분량을 해치웠다. 조금 속도를 내면 점심시간 전에 하루 일이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동료들은 놀라워했다. 그러나 속도가 좀 빨랐을 뿐 내가 일을 적게 한 건 전혀 아니었기에 나는 약 1년쯤 뒤 심각하게 손가락 통증을 호소하며 치료를 받았다.


훗날 손에 주사를 맞게 될 지경으로 일을 했는데도 근무 시간은 너무 많이 남았다. 하지만 이 땅의 모두가 그렇듯이 일을 다 했다고 집에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있는 온갖 시설을 이용하거나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글이나 일기를 쓰거나 SNS 계정을 관리했다. 평소에 컴퓨터 앞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평일 근무 시간으로 미뤄두었다. 그랬어도 산출물 품질이 나쁘다거나 기한을 넘겨서 지적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렇게 합리적인 이유 없이 한 장소에 갇혀 흘려보내야 했던 세월들이 아깝다.


단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회사에서 규정한 퇴근 시간이 되지 않아서 우리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우리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보냈을까?


최근에 읽은 <가짜 노동>이란 책을 읽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고 공감했던 까닭에는 내 머릿속 어딘가에 저런 후회스러운 한탄이 남아 있던 탓도 있었을 것 같다. 다만 저 책에서 말하는 ‘가짜 노동’은 실질적인 효용이 없을 뿐 업무의 일종으로 보이긴 하는 행위들을 주로 일컫는다. 시간 때우기 용 문서 정리라든지 그럴싸한 모임을 만들긴 했지만 영양가 있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 회의 말이다. 나의 가짜 노동은 그것보다 더 안타까웠다. 내 직무에 맡겨진 일들을 다 해버려서, 있는 업무가 없어서 그야말로 시간을 죽이기 위해 했던 것들이 대부분이니까. 어쩌면 가짜 노동보다는 ‘가짜 삶’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니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고 싶지가 않다. 일을 다 했으면 퇴근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정당하고 합리적인 게 아닐까? 시간은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당장 회사에서 노동자 혁명을 일으킬 수 없고 앞으로 10분 후에 퇴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적어도 내가 가짜로 살았음을, 지금도 가짜로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해야겠다. 평일에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지 못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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