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결국 우리가 일을 다 했거나 일이 없어도, 엉덩이나 시간을 팔지 않았어도 집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루 9시간 근무해야 한다는 게 지구가 부글부글 끓고 있어도 지켜야 하는 아주 중요한 법칙처럼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사람들을 붙잡아 놓기만 한다고 해서 생산성이 오르지는 않는다는 걸 모르는 이는 이제 없을 텐데도 그렇다.
내가 발견한 데이터에 따르면 2022년 기준 OECD 국가들의 주당 평균 근로 시간은 37.6시간이라고 한다. 9시에서 5시까지 일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미국의 값이 38.8시간인 걸 보면 미국 사람들도 꽤 오래 일하는구나 싶지만 한국인들은 그것보다 더 일한다. 반면 같은 기준을 놓고 봤을 때 네덜란드는 30.4시간, 덴마크는 33.4시간이라고 하며 서유럽, 북유럽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주당 근로 시간이 낮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예전부터 잘 먹고 잘 살던 나라들이 일도 적게 한다고 넘어갈 수도 있다. 늘 자기가 있는 곳보다 수준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는 한국적 정신은 왜 이런 데에는 적용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근래 문득 든 생각이 있다. 별 의미도 없이 긴 노동 시간의 뒤편에 가부장제가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나는 퇴근 후 평균적으로 1시간 15분을 소모해 집에 도착한다. 오후 6시가 되자마자 퇴근해도 보통 밤 7시 10분에서 20분 사이다. 한편 나는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어서 남은 밥과 반찬만 꺼내 먹으면 되고 설거지도 굳이 강요받지 않지만, 저녁을 먹고 식탁과 그릇을 정리하는 것까지 최소한 20분은 걸린다. 벌써 밤 7시 30분이다! 외투를 걸고 소독약으로 핸드폰을 닦고(코로나 발병 이후 생긴 습관이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충전기에 꽂고 씻으러 들어갔다 나오면 밤 8시. 벗은 옷을 세탁기에 넣고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골라 놓고, 가끔 택배가 와 있으면 뜯어서 정리하고 몸이 지나치게 뭉친 느낌이면 폼롤러로 마사지를 하거나 요가 스트레칭을 해주는 편인데 이러면 금세 밤 9시가 넘어버린다. 아뿔싸! 하필 나는 피곤해도 잠에 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서 일찌감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야 한다. 핸드폰은 오래 들여다보지 못하고, 40분짜리 드라마 한 편을 보거나 일기를 허겁지겁 쓰면 잘 시간이 오고 만다. 이렇게 평일 하루가 끝나버렸다.
위의 서술을 보면 내가 퇴근 후 정말 기본적인 행동만 했고 개인 시간은 1시간도 채 가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저런 일상조차 내가 저녁을 요리할 필요가 없으며, 설거지를 하거나 세탁기를 돌리는 등의 필수적인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살면서 끼니와 위생을 챙기는 등 꼭 필요한 일들을 하느라 자정을 넘겨 자야만 할 텐데, 아침 9시까지 출근하려면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일어나야 하는 게 보통이다. 개인의 휴식과 건강 챙김은 증발해 버렸다. 이러니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퇴사를 하게 되고 유급 휴일을 병가로 계속 소모하며 자아를 위한 시간은 자꾸만 먼 이야기가 된다.
내 방 하나를 깔끔하게 돌 볼 시간이 없다. 건강하고 신선하게 요리를 하려면 너무나 많은 걸 희생해야 한다. 하루 9시간 근무에 갇힌 근로자는 꼭 365일 켜져 있는 스마트폰 같다. 쉴 틈이 없다. 그나마 스마트폰은 부품을 교체하거나 새 제품을 살 수라도 있지, 우리는 스트레스가 꽉 들어찬 머리를 갈아 끼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걸 버티게 하기 위해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 외에 모든 걸 해줄 사람의 존재가 당연하다고 억지로 주입하는 시스템, 즉 가부장제가 21세기가 성립된 지 23년이 지난 지금에도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주 9시간 근무의 법칙은 집안일, 위생, 식사 등을 책임지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 하에 세워진 것이 아닐까?
내 경우 아빠가 직업을 내려놓은 이후 집안 청소를 맡게 되면서, 내가 한창 일하고 있는 주중 낮에는 아빠가 내 방을 청소해 준다(주말엔 내가 한다. 믿어달라!). 아침은 내가 뭐라도 꺼내 챙기지만 퇴근하고 와서 먹는 저녁은 엄마가 맡아주고 있다. 그리고 결혼하면 이걸 여성, 아내가 하는 게 지금까지도 가부장제가 아등바등 붙잡고 있는 비과학적인 관성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내가 없으면 나이가 두 자릿수인 자녀가 한다. 출퇴근하는 아빠 혹은 남편은 적어도 9시간은 근무해야 하니까 그런 자잘한 집안일에 신경 쓸 틈이 없다.
만약 남자가 회사에서 잡아먹히는 시간이 줄어든다면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물리적으로라도 발생하게 되는 것과 같다. 마치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장인들이 근무 전이나 휴식 시간에 후루룩 청소기나 세탁기를 돌릴 수 있는 것처럼. 이전 회사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는 분이 실제로 이런 증언을 해주었다. 재택근무를 하면 집안일을 할 짬이 생겨서 좋다고 말이다.
우연찮게도 앞에서 근로 시간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언급되었던 국가들은 양성 평등이 꽤 잘 세워진 곳들이다. 네덜란드와 덴마크 외에도 노르웨이, 독일, 핀란드 등이 주 36시간을 넘지 않았다. 여성 인권이 상당히 잘 존중되고 있으며 현재 국가 수장도 여성인 아이슬란드의 주당 근로 시간은 35.5시간이었다. 정말로 연관성이 있을 것 같지만 나는 사회학자가 아니라 확신하진 못한다. 다만 내가 사는 곳에 상주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았다면 하루 9시간 근무에 갇혀 있는 내 삶이 무척 바쁘고 불행했을 것이라는 전망은 든다.
참고로 부모님이 집을 비우실 때가 있다. 그런 날에 나는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후다닥 빨래를 개고, 저녁이 되면 그다음 날 아침을 먹으면서 사용할 그릇까지 미리 식탁에 놔둔다. 남은 반찬이 마땅치 않으면 퇴근하는 중에 앱으로 음식 포장을 시켜 놓는다. 일어나자마자 세탁기부터 돌릴 때도 있다. 벌써 앞서 서술한 일과와 큰 차이가 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