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와 겨울철에는 노인들이 돌아가시는 일이 많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사내 게시판과 캘린더에 결혼보다는 조사 소식이 훨씬 많이 등록된다. 보통 조부모가 사망했다는 내용인데,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조부모가 친할머니 한 명만 생존해 계셨으며 그분은 내가 코로나 감염으로 격리 중일 때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장례식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할머니의 죽음이 나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않았던 건 아니다. 100세가 다 되도록 사셨으니 충분한 수명을 누리셨고 나와는 별 인연이 없는 분이셨으며, 엄마를 힘들게 한 걸 한동안 같은 집에서 목격한 데다 아빠에게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은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 내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일은 부모님의 이혼이라든가 하나뿐인 언니가 내 곁을 떠나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렇게 예정되어 있는 나의 슬픔은 제도적으로 존중받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무원 생활을 할 때 동료분이 누나를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으셨다. 두 사람은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데 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형제자매의 사망을 위한 경조휴가는 1일만 제공된다. 가깝게 지냈던 가족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엔 몹시 짧은 시간이다. 당시에 나는 그게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와 함께 살면서 유년기를 같이 보낸 형제자매의 죽음이 평가절하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동료분도 하루 만에 일터로 복귀하지는 못하셨다. 나도 그럴 것 같다.
감사하게도 내가 다니는 회사의 경우 형제자매의 사망 시에 받는 경조휴가일을 조부모의 사망 시에 받는 경조휴가일과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근로기준법에는 경조휴가 규정이 없어 아마 본인이 다니는 회사에 따라 사정은 다 다를 것이다. 한편 부모의 사망으로 받는 경조휴가일은 5일이다. 과연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만 치르고 복귀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산 자의 삶을 살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몇 달쯤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죽음은 당연하면서 결코 당연하지 않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라고 영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런데 부모님의 죽음보다 지금 내게 현실적으로 더 가까이 있는 것은 부모님의 이혼이다. 사실 부모님의 이혼 위기는 꽤 오래전부터 잊을 만하면 내 일상에 등장했고, 나는 개인적으로 부모님이 독립적이면서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셨으면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상황에 내가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건 아니다. 사랑이 없는 관계, 누군가의 어리석은 잘못들, 말 못 할 부끄러운 일들이 쌓이고 쌓여 맺은 결말은 다 큰 성인에게도 심리적 충격과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길 것이다. 가치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인간이 기계나 돌덩이가 되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벌써부터 슬프다. 앞으로는 엄마와 아빠를 한 자리에서 보지 못할지 모른다. 주인 없는 방을 청소할 때마다 누군가의 빈자리를 느낄 테고, 옛날 사진을 보는 게 어색해질 거고, 끊어진 인연의 잔재가 끼치는 영향을 끊임없이 목격해야 할 것이다. 가끔 이유 없이 눈물짓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 생각만 하면 울고 싶어 졌으니까.
그리고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적어도 시스템은 나를 별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건 변하지 않으리라.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조부모의 죽음보다 형제자매의 죽음에 훨씬 많이 슬퍼할 사람이며 두 분의 이혼에 많은 영향을 받을 게 분명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나는 그 두 가지 사건에 제도가 보장하거나 보장하지 않는 바보다 더 오래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그건 내가 살아온 역사가 나에게 부여한 특징과 같다. 그게 특징이 아니라 권리로 발전한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