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생하는 억압
이사 선물로 이모가 에어프라이어 오븐을 사주었다. 지금까지 에어프라이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는 신문물이 찾아온 셈이었다. 사실 나는 좁은 집에 전자레인지 기능도 없는 에어프라이어 오븐이 있어봤자 자리만 차지하고 별로 쓸모가 없지 않겠느냐는 입장이었으나 막상 제품이 오니 크로와상 생지와 냉동 피자를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다 시범 운행을 위한 거니까 그럴 수도 있지, 크흠.
그러나 그 두 가지보다 먼저 준비된 게 있었으니, 바로 현금가 2500원어치 고구마였다. 손가락 2~3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가 대부분인 자잘한 크기였으나 가격도 저렴하고 에어프라이어 안에서 잘 익을 테니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양도 딱 바스켓 하나를 다 채울 만큼이었다. 고열을 내뿜는 에어프라이어를 주방 조리대 위에 올렸다가는 상판에 금이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므로 우리는 작은 밥상을 펴서 그 위에 제품을 놓고 군고구마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특별한 요령을 부리지는 않았다. 설명서에 나와 있는 대로 예열을 살짝 한 뒤에 다이얼을 200도에서 25분으로 맞추었다. 나는 엄마 표현에 따르면 ‘이런 거 한 번 못 써본 촌사람처럼’ 빛과 열을 내뿜고 있는 에어프라이어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행히 뭔가가 타는 냄새가 아니라 고구마가 구워지는 향기가 났다. 꽤 맛있을 듯한 향이라서 우리는 아예 저녁 메인 메뉴를 군고구마로 정했다. 여기에 두유와 한 팩에 5000원인 작은 딸기들이 합류했다.
조리가 완료되어 맛있게 구워진 고구마를 먹는데, 아침이나 점심도 아니고 저녁을 이렇게 해결한 적은 처음이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아무래도 전에는 아빠 때문에 알게 모르게 한계가 있었다. 아빠는 엄마랑 말다툼을 하면 밥 한 끼 차려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냐, 밥 해주는 게 벼슬이냐 같은 말을 곧잘 했는데, 그런 점을 상기해 보면 타인의 품이 들어간 밥을 먹는 게 아빠에겐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나 엄마는 다르다. 아침을 늦게 먹었으면 점심 즈음에는 알아서 간식을 찾으며 슬그머니 시간을 넘겨도, 케이크 하나로 저녁을 때워도 괜찮았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렇게나 먹어도 괜찮은 자유’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마음대로 장보기를 할 수 있는 자유’로 이어졌다.
처음으로 이것저것 골라 담은 과자를 한 박스 샀다. 나 혼자 먹기 딱 좋은 순살 치킨을 사서 엄마가 늦게 온 날 혼자 저녁으로 먹었다. 내가 불매하고 싶은 브랜드는 확실하게 거를 수 있다. 한편으로는 TV로 유튜브와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청할 수 있다. 냉장고에 가랜드를 붙이고 버텨도 되고, 엄마는 마음껏 다른 사람과 통화하거나 가끔 이모를 부를 수 있다. 아빠가 그런 걸 하지 말라고 명시한 적은 없으나 나나 엄마나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눈치를 봤던 모양이다.
다음 주에는 엄마가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낸 아주머니가 집에 놀러 온다고 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옆집에 사셨던 분인데 아직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분이다. 참고로 엄마는 아빠와 떨어지기 전에는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분이 동네 근처로 찾아와 몇 번 점심 식사를 함께 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엄마의 약속 날짜에 맞추어 조각 케이크를 미리 사야겠다. 샘을 내며 부리나케 뺏어 먹으려 드는 사람이 없으니 2조각만 사도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