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을 하면 교실에서 꼭 먼저 전원을 눌러 작동시켜주어야 하는 교실의 4대 천왕이 있다. 냉/온풍기, 공기청정기, 컴퓨터, TV다. 나는 위에 적힌 순서대로 출근길에 작동을 시키며, 하루 종일 저 기구들의 도움 속에 생활하고, 퇴근 때에는 반대 순서대로 끄고선 퇴근을 한다. 사실 저 중에 하나라도 없다거나, 아예 작동을 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원하는 대로 기능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수업과 활동에도 아주 큰 지장을 주곤 한다.
우리 교실에는 아주 큼지막하고, 그만큼 두툼하고, 화질은 선명하지 않으며 지이잉 하며 고주파 소리를 미묘하게 내뿜는 2009년형 TV가 달려있었다. 심지어 삼성 PAVV라는 모델명 시리즈를 가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수학 시간이었다. 무언가를 설명하다가 아주 중요하다고 다시 한번 여기를 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내 손에는 높이 달려있는 TV를 가리키기 위해 투명한 플라스틱 자가 들려있었다. 자로 TV를 톡톡 치면서 정말 열심히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 ‘톡톡’ 소리와 함께 TV 화면의 색깔이 제멋대로 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걱정이 되어서 TV 전원을 우선 껐다. 그렇게 TV는 다시 켜지지 않았다. 아무리 전원 버튼을 눌러도, 리모컨으로 조작을 해도 켜졌다는 붉은 LED 등만 들어올 뿐, 화면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검은 화면 밖에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있었는데, 화면 안쪽에 미세하게 실금 같은 것이 나 있었다. 행정실에 이야기를 하고 AS 신청을 했다. 오후에 기사님이 방문하셔서는 너무 오래된 모델이라 수리할 수 있는 부품 자체가 없는 제품이라고, 즉 AS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말씀만 남기고 떠나셨다. 행정실에서는 TV가 꼭 있지 않아도 되는 다른 공간에 있는 TV를 옮겨줄 것인지, 아니면 새 TV를 주문할 것인지를 한참 고민하였다.
결국 너무 오래된 TV였기에 새 TV를 사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우리가 뭐 온라인 마켓이나, 전자제품 매장에 가면 당일 혹은 익일 배송에 설치까지 깔끔하게 해 주지만, 100만 원이 넘는 제품을 공공기관에서 구매하다 보니 제품 설치일이 점점 늦어졌다. 거쳐야 하는 절차가 복잡하며, 업체에서도 빠르게 배송/설치해줄 필요를 못 느끼고 2주로 정해져 있는 기한만 맞추려고 노력한다는 답을 듣게 되었다. 우리 반은 TV 없이 그 기간을 지내야 했다.
‘교사가 최고의 콘텐츠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콘텐츠도 전달해줄 매체가 필요하다. 하물며 같은 교실 안에서 콘텐츠를 전달하려고 해도 TV만큼 확실하고 효율적인 매체는 없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같은 학년에 한 선생님이 교실에 남는 빔 프로젝터가 있다며 한 번 그 기간 동안 사용해 보겠냐고 했다. 나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덥석 감사하다고 했다.
이동식 빔 프로젝터라 평소 내가 생활하던 우리 반 교실 배치에서는 불편함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빔 프로젝터를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교실의 구조와 배치를 조금씩 바꾸었다. 이전까지는 ‘교실 배치를 이런 식으로 유동적으로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상치 못했던 배치였다. 나의 실수로 한 단계, 한 단계 점점 진행되어가는 사건이었지만, 정말 우연히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공간 혁신의 맛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어색해요, 이상해요’라며 TV를 그리워하던 아이들이 점차 그 시스템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사실 TV를 사용할 때와 화면의 위치나 보이는 형식만 달라졌을 뿐, 크기나 선명한 정도는 비슷했다. 나 또한 빔 프로젝터를 사용한 수업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교실 칠판이 화이트보드를 펼쳐서 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화이트보드 한 가득 빔을 쏘았다. 그 사진 위에, 영상 위에, 문제 위에 직접 글씨를 쓰고, 풀이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경험은 TV에서는 별다른 스마트 도구나 장치 없이는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도 그런 점에서 더 집중이 잘 되었고, 무엇보다 신기했기 때문에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TV가 설치되었다. 이전의 TV보다 조금 더 커지고, 많이 얇아지고, 많이 선명해진 최신형 TV였다. 처음에 TV가 고장 났을 때는 걱정거리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전화위복이 되어 더 큰 발전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은 언제 빔프로젝터에 푹 빠졌었냐는 듯 TV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고, 나 또한 더욱 개선된 TV 환경 덕분에 조금은 더 폭넓은 자료를 준비하여 보여줄 수 있었다.
TV. 개별화된 자료를 제공하기에 아주 나쁜 수업 보조 도구다. 모두에게 일괄적인 자료와 정보만을 제공할 수 있으며, 너무 시각적인 자극 만을 주는 도구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TV가 아닌 다른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교육을 개발하여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 또한 어느 정도 공감한다. 교사는 그 자체로 최고의 콘텐츠라는 말이 너무나도 타당하다. 하지만 TV가 주는 학습 활동의 이점을 대신할 만한 매체나 콘텐츠가 충분히 보급되어 있지 않다. 언젠가 학교에서 TV를 사용한다고 말하면 옛날 사람 보듯 놀림받는 날이 올 것이다. 분명히 그런 날은 올 것이다. 더 좋은 것이 나타나고, 그것이 대세가 될 것이니까. 그때까지 만이라도 조금만 TV를 사랑하려고 한다.
요즘은 TV에 손도 대지 않고 조심조심 잘 다루고 있다. 사랑하는 TV랑 멀쩡하게 오래오래 지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