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 빅뱅 - (상)
“옷, 머리, 신발, 양말, 싹 다 젖어요~ 물에 젖고 물만 맞는, 여기는 아마존이에요~ 아, 마, 존조로~존존.”
(유튜브 영상 ‘에버랜드 아마존 N년 차의 멘트! 중독성 갑’ 중)
유튜브에서 발표한 '2022년 대한민국 최고 인기 동영상'의 한 소절이다. 지난해 4월 처음 업로드되었고 현재 조회 수는 2600만을 넘었다. 유명 연예인들이 패러디할 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혹시 모르는 독자를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해당 영상은 에버랜드 안에 있는 ‘아마존 익스프레스’라는 놀이기구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을 촬영한 것인데, 랩 같은 안내 멘트가 자꾸만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해당 영상이 유명해진 이유다. 물론 리듬이 중독적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그 신나는 랩을 능숙하게 하면서도 표정에 ‘영혼이 없는’ 영상 속 직원이다. 누군가 그를 ‘소울리스좌(soulless+座)’라고 명명해 큰 호응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이 진정성 없다며 폄하한 게 아니라,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면서도 영혼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 ‘프로다운’ 면모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 시기와 맞물려 미국에선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라는 말이 화제로 떠올랐다.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건 아니지만 주어진 업무 이상의 노력을 쏟지 않겠다고 내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일에 쫓기듯 살며 ‘번아웃(burn out·소진상태)’을 겪은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으며 세계적으로 번져 나갔다.
우연치 않게도 국내외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두 현상은 일(work)의 세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개인의 가치관은 물론, 이들이 모여 일하는 직장의 겉(사무실)과 속(조직문화 및 제도), 나아가서는 노동시장 전반의 구조적 변화이다.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이 같은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가리켜 ‘오피스 빅뱅’이라는 트렌드 키워드로 표현했다. 새로운 우주질서가 시작된 ‘빅뱅(대폭발)’이 뜻하는 바처럼 일의 세계도 재편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현상 중 하나는 ‘이직’ 및 ‘퇴사’라는 단어의 사용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의뢰하여 코난테크놀로지가 온라인상에서 이직과 퇴사를 언급한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직과 퇴사에 관한 언급량이 2년 전에 비해 2배 가량 증가했다. 이뿐만 아니라 부정적 감성어 비율의 경우, 48.4%로 압도적이었던 것이 39%로 줄어들었다. 대신 긍정·중립 비율이 늘어났다. 과거에는 이직과 퇴사가 일생일대의 결심이 필요했던 일이지만 최근엔 적극적인 커리어 탐색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커리어 관련 플랫폼이 몇 년 새 크게 성장한 것도 노동시장의 변화를 상징한다. 예를 들어 일명 ‘커리어 SNS’인 ‘커리어리(Career.ly)’는 개발자 직군을 중심으로 일과 관련된 소식과 생각을 교환하는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인기가 높다. 이직이 많아지면서 경력직 채용을 전문으로 하는 플랫폼도 증가했다. 명함 관리앱으로 출발한 ‘리멤버’는 채용 제안을 받아 볼 수 있는 ‘리멤버 커리어’ 서비스로 사업을 확장했다.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로 성장한 ‘블라인드’ 역시 ‘블라인드 하이어’라는 채용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특정 시장을 공략하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리멤버 커리어에서는 전년도 근로소득 1억 원 이상을 인증한 사람만 이용 가능한 억대 연봉자 전용 채용관 ‘리멤버 블랙’을 열었다.
관심업계의 현직자와 커피 한잔하며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도 있다. ‘커피챗’이란 서비스는 20분간 현직자와 일대일 통화를 연결해 주고, ‘묻다’라는 앱은 미리 현직자에게 궁금한 것을 제출하면 5분 단위로 질의응답을 할 수 있도록 익명 통화를 연결해 준다.
직장을 옮기지 않고도 현재 자리에서 사이드잡(side job) 혹은 사이드 프로젝트(side project)를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중요한 현상이다. 교육 관련 기업 콤파씨와 캠퍼스멘토가 2040 응답자 250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2022년 12월 30일~2023년 1월 13일) 응답자의 90%가 사이드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도 있었다. 여기서는 ‘본업의 상대 개념으로 부수입 창출 목적으로 하는 일’(38%)이라는 응답만큼이나 ‘본업 외 관심 있는 분야를 경험하는 일’(37%)이라는 응답이 많았으며 ‘취미활동의 연장’(20%)이라는 응답도 상당했다. 과거 경제적 목적에만 초점을 둔 ‘부업’과는 달라진 것이다.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곳은 개발자업계다. 디자이너 직군의 경우 프로젝트 단위의 일거리가 많다 보니 사이드 프로젝트는 물론, 프리랜서 형태로 일하는 사람도 많다. 산업구조가 변하면서 개발자와 디자이너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이들 직군을 시작으로 노동문화도 변화가 시작됐다. 이러한 트렌드의 배경에는 산업·기술 변화와 같은 거시적 흐름이 있는 것이다. 플랫폼 서비스의 발달로 일거리와 사람의 연결이 더욱 유연해지고 있다는 것도 한 몫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시장의 주축으로 자리 잡아가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평생직장'이란 말이 낯선 단어가 되었고, 현재의 희생으로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더욱이 지금의 젊은 직장인들, 즉 밀레니얼 세대는 ‘미 제너레이션(me generation)’이라 부를 만큼 '나'를 중시한다. 단순히 자신을 아낀다는 의미를 넘어 자신을 ‘키우는’ 세대다. 일을 통해 자신의 성장을 경험하기를 원한다.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고 조직의 부품이 되어 일한다고 느낄 때 '현타'를 느낀다.
개인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조직 및 사회에 기여한다는 의미라도 찾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조용한 사직’을 다짐하고 ‘소울리스’가 되어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을 만한 일을 직장 밖에서 찾아나서는 것이다.
다음편 - 오피스 빅뱅 (하)에서 이어집니다